◇ 열람: 모두 / 글쓰기: 관리그룹 / 댓글: 정회원 이상
성경 막12:1-12
제목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 혼자 생활한지 닷새가 지났습니다.
기러기 아빠들의 심정이 어떨지 요즘 속속들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가족들 보고 싶은 거야 둘째 치고 혼자 생활하는 게 너무 힘듭니다.
세탁기는 언제 돌려봤는지 생각도 안 나고, 혼자 우아하게 커피 한 잔 하고 싶은데 커피 기계를 조작한 적이 없어서 무용지물입니다.
쓰레기 봉지가 어디 있는지, 샴푸는 어디 있는지, 꽝꽝 언 돼지갈비는 어떻게 해 먹는 건지, 10년 넘게 살아온 내 집이 갑자기 다른 집 같은 겁니다.
뭐보다 밥 해 먹기 싫어 죽겠는데 그 놈의 끼니는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모르겠습니다.
항상 그렇지요?
우리는 늘 내게 주어진 복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할 일도 그게 오래 계속되면 더 이상 감사나 축복이 아니고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의 감격이나 예수 안에서 얻은 새로운 삶의 기쁨은 더더욱 오래 유지하기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접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축복과 여건과 환경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모두가 다 우리 주님께서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입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말아야 될 게 감사요, 찬양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공로로 얻은 죄사함과 구원받을 믿음 주신 것에 감격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 생각과 입술에서 떠나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착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그런 사례를 말씀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깨어 경성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기억해 내고, 감사를 회복하며, 삶 가운데 맡겨진 우리의 사명을 다시금 뜨겁게 붙잡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곳에 한 마음씨 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저 불모지에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한 떼의 화전민을 발견합니다.
가슴에 끓어오르는 연민과 사랑을 가눌 길이 없어서 그는 자기의 재산을 다 투자해서 포도밭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는 것이 그 사람 생애 최고의 소원이었습니다.
먼 물줄기를 끌어오기 위해서 수로를 내고 관개시설을 했습니다.
그래서 황량한 불모지를 옥토로 만들고 최상품 포도나무를 갖다 심었습니다.
울타리를 치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포도밭을 이 가난한 농부들에게 공짜로 주었습니다.
마음껏 가꾸고, 마음껏 생산하고, 마음껏 사용해서 풍요하게 살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다만 소출 중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을 세(稅)로 낼 것을 서로 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아마도 이 주인이 이 마을을 떠날 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동구 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배웅했을 겁니다.
“우리는 당신이 아니면 다 죽었을 운명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정한 세 뿐이겠습니까? 우리를 살려주신 분인데 뭐든지 원하는 건 다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마도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진심으로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건 진심이었습니다.
절대로 그냥 해 보는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착한 주인이 세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을 때, 농부들은 변해 있었습니다.
그 고마운 주인도, 그 때의 감격도, 은혜도 다 잊어버린, 무서운 폭도들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씨 착한 주인의 종들을 몽둥이로 치고 돌로 때려서 상처를 입히고 빈손으로 보냈습니다.
주인은 다른 종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또 종을 두들겨 패고 빈손으로 보냈습니다.
몇 번이나 이런 일이 거듭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주인이 생각하기를 “내 아들을 보내면 뭔가 달라지겠지” 생각하고 이번엔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 아들까지 죽이고 맙니다.
이것을 본 주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이 농부들을 다 잡아죽이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줘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흥분하게 됩니다.
정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이들이 이렇게 악한 농부들로 바뀌었을까요?
이 얘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농부들은 세 가지를 착각했습니다.
첫째, 이 농부들은 주인이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곳에 주인이 있었다고 하면 감히 그런 악한 생각과 행동을 저지를 엄두도 못 냈을 것입니다.
주인의 눈치도 살피고, 예절도 철저하게 지키고, 주인에게 바칠 세를 바치면서 온갖 충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가까이 없으니까 무슨 짓을 해도 주인이 모를 거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이 정도는 모르겠지 하면서 슬쩍슬쩍 부정도 하고, 사기도 치고 바칠 것을 떼먹기도 하다 보니까 마침내는 포도원을 통째로 삼키고 싶어진 것입니다.
욕심과 이익에 눈이 어두워진 이들은 마침내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주인을 몰라보는 미친 개가 된 겁니다.
그래서 눅12:15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골3:5 도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권면합니다.
오늘을 사는 인간들도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잘 모를거라 생각하고 함부로 죄를 저지릅니다.
종을 보내고, 아들을 보내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악용합니다.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비를 골고루 내리시고,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추시는 하나님의 관용을 악용합니다.
한없이 기다리시는 그 인내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오용 내지 악용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무슨 짓을 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든가, 설사 계신다 해도 저 하늘 멀리 계셔서 우리가 하는 일을 잘 모를 거라고 착각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제때 처벌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가 살아 남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면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바로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시는 -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포도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신 곳입니다.
이곳에서 살면서 저와 여러분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고 있나요?
아니면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셔서 내 생각과 하는 일을 잘 모를 거라고 착각하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너무나 많은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저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이 있지만 생활 속에는 전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착각은 자유지만 그 뒤에 오는 모든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들 몫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 여름에 우리가 한 일’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것을 낮에도 밤에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분의 사랑을 느끼는 것과 똑같은 부피만큼 그 분을 두려워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이들이 악한 농부가 된 이유는 이들이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자유롭고 풍요롭게 산다 해도 이들은 여전히 소작농입니다.
그들이 편히 눕고, 잠자고, 쉬고, 먹고 사는 것은 모두가 주인의 포도원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쓰다 보니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남의 것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게 인간의 본심입니다.
이들의 임무는 어떤 걸까요?
주어진 포도밭을 잘 가꾸고, 정당한 세를 적기에 바치고, 주인의 환심과 인정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자 처음 가졌던 고마움과 감격은 식어지고 생활이 점점 윤택해집니다. 따라서 주인에게 바칠 것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 바치는 것이 아까워 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인의 명령대로 살아야 하는 자기들이 임무를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들의 소유권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주인의 종들이 왔을 때 농부들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무슨 소리야? 이게 도대체 누구의 포도원인데... 땀 흘리고 애 써서 거두어들인 건데 이걸 내놓으라고? 한 톨도 줄 수 없어”
그러면서 주먹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집어삼킬 욕심에 눈이 뒤집혀 버리게 된 겁니다.
인간들도 하나님이 포도원으로 주신 이 땅, 하나님이 주신 생명, 그가 주신 건강, 물질, 가정 등등의 모든 것에 스스로가 주인이 되기 쉽습니다.
너무 오래 쓰다 보니까 주인은 잊어버리고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오래 동안 들어와서 잘 아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이 땅의 청지기(관리자)일 뿐이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 얘기를 얼마나 많이 들어왔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물질도, 생명도, 가정도, 지식도, 권력도, 재능도...
하여간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지만 남의 것도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것도 내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립니다.
한 마디로 세상 모든 게 다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온갖 사기와 폭력과 부패와 부정의 온갖 죄악들이 샘솟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라디오 아침 방송에 “생활 법률 상담”이란 프로가 있었는데 거기서 가장 많이 상담을 청하는 경우가 명의변경을 해주고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한때 1가구 2주택자 -한 사람이 집을 두 채 가지고 있는 경우- 에 정부에서 세금을 아주 무겁게 매긴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집 한 채를, 아직 집이 없는 아주 친한 친구한테로 명의변경을 해 놓았습니다.
세금 때문에 친구에게 자기 집을 잠깐 맡겨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명의 변경을 받은 친구가 어느 날, 그 집을 담보로 은행에 대출을 받습니다.
그러고는 그 대출금을 갚지 못해서 그 집이 은행으로 넘어가서 경매를 당하게 됐습니다.
이것을 뒤늦게 안 실제 집 주인이 법에 호소를 해 온 것입니다.
이 집이 실제 누구의 집입니까?
이름은 자기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집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자기 것처럼 대출을 받아 놓고 나 몰라라 하고 버티는 것입니다.
결국 원래 집 주인은 집도 잃고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상담자가 하는 말이 “사람과 재산을 함께 잃어버리고 싶으면 명의변경을 해 주어라” 그러면서 상담을 끝내는 것을 들었습니다.
비단 오늘 나오는 악한 농부나 지금 예에서 나온 그런 사람들만이 착각할까요?
그들만이 남의 것,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아는 착각을 할까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는 않습니까?
한 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넘칠 때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도 더 많이 바치고도 기뻐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점점 사라지고, 반대로 생활은 점점 여유가 있게 될 때 여러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혹시 주신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늘어나는 십일조 액수에만 눈이 어두워지지는 않습니까?
그 모든 것이 단지 내 수고와 노력으로만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그러면서 나처럼 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저것들은 왜 그렇게 게으를까?” 정죄의 눈길을 보내지는 않나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 내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죽을 때 보면 그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가는 게 없습니다.
이 세상의 존재하는 유형 무형의 모든 소유는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관리할 뿐입니다.
내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그때부터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집에 온 자녀들도 사실은 내 아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손님입니다.
이십 수년 동안 잘 기르고 모셨다가 보내야 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요, 손님입니다.
그래서 한때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 그겁니다.
“아니! 손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우리 진짜 아빠한테 이른다!”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의 것을 그분의 뜻에 맞게 잘 가꾸고, 하나님께 바칠 것은 바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진정한 위임 받은 자이고 관리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도 내 것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럴 때 우리 역시 악한 농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용서받기 어려운 착각입니다.
다시 한 번 청지기로서 우리들의 본분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이들이 악한 농부가 된 이유는, 끝을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고 나면 포도원이 자기들 것이 되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계산 착오였습니다.
주인의 무서운 심판과 징벌이 있을 것을 생각 못했습니다.
눈 앞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내일, 주인의 심판이 있음을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는 대로, 욕심대로, 살기 편한 대로 다 해버렸습니다.
그토록 어질고 착한 주인의 아들을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 그들 앞에 있었는지를 잘 살펴보세요.
오늘 인간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내일을 볼 줄 모릅니다.
마음대로 살다가 죽으면 다 끝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믿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편리한 대로 살아갑니다.
무슨 짓이든지 합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자기가 하나님도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선언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2:14절에도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경고합니다.
전도서 11:9절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고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에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최후 심판의 그 날!
죄들이 소리치고 나올 때가 옵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모든 죄를 자기 입으로 직고할 때가 온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지 못한 모든 죄들이 벌거벗은 것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이 시간 다같이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실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일 뿐입니다.
사실 마음씨 착한 이 포도원 주인보다 더 사랑이 크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가난한 농부들보다도 더 비참하게, 죄와 죽음과 심판의 운명을 안고 죽어가던 존재가 저와 여러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보혈로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말씀과 교회를 통해서 이토록 풍요한 삶을 살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요, 구원의 감격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한 해, 두 해, 신앙생활이랍시고 살아가는 동안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악한 농부입니까? 아니면 선한 청지기입니까?
우리는 구원의 감격에 대해 자주 말씀을 나눕니다.
하지만 심판에 대해서는 듣기도 전하기도 싫어합니다.
하지만 구원의 감격만큼 심판의 얘기 또한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만약 그 모습 그대로 삶을 끝내면 우리는 지옥 불에 던져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바라시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구원은 단 번에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는 것이지만, 그래서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또 하나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우리의 모습이 성화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점점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다가 마침내는 우리 역시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만 아울러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한 쪽은 사랑으로, 또 한 쪽은 정의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새가 좌우의 어느 한 쪽 날개만으로는 날 수 없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역시 사랑이나 정의 한 쪽만으로는 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되새겨 보십시다.
그렇게 좋은 포도밭을 그냥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밭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약간의 세만 부과했습니다.
농부들은 아주 안락하고 풍요롭게 삽니다.
애당초 농부들은 자기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이 몸만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희생이 큽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그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첫째 종이 맞고 맨손으로 왔을 때 참았습니다.
두 번째도 참았습니다. 세 번째도 참았습니다.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계속 참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효과가 없자 자기를 대신한, 곧 주인이 될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그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사실 그 아들이 갔을 때, 이번에야말로 정말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빌었다면 여태껏 주인이 해 온 것으로 봐서 충분히 용서하고 그냥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전의 풍요와 편안한 삶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참아야 합니까?
여기서 참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만약 참는 게 사랑이었다면 정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주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농부들의 잘못입니다.
그들의 착각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이 없는 줄 착각했습니다.
주인은 안 보일 뿐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작농이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자기들이 주인인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분명 따로 있습니다.
또 그들은 그들의 종말을 착각했습니다.
상속자 아들을 죽이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더 이상 참지 않고 진노하는 그 아버지를 왜 계산에 넣지 않았을까요?
오늘의 이 이야기는 인류 역사를 함축한 너무나 의미가 깊은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포도원 주인을 하나님으로 대입시켜 보세요.
그리고 포도원을 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그리고 농부들을 우리들 -인류로 대입시켜 보세요.
또 수도 없이 와서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간 종들을 하나님의 선지자들로 바꿔보시고,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바꾸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수도 없이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숱한 인내 끝에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마지막 기회였던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기회를 잡은 이상 우리는 더 이상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사십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조심스럽게 살아가십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래서 내게 맡기신 것으로 겸손하게 사용하십시다.
또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그 날을 바라보면서 인내로 이겨나가십시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선한 청지기로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그렇게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기억하면서, 청지기로서 겸손하게, 또 승리의 그날을 바라보면서 늘 감사와 은혜와 풍요가 넘치는 여러분과 저의 한 생애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