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람: 모두 / 글쓰기: 관리그룹 / 댓글: 정회원 이상
성경 창29:31~35
제목 레아, 라헬 그리고 은혜
제가 청년 시절에 합창단 수련회를 갔다가 거기서 인성 관계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30명 남짓한 단원들 개인 개인마다 그 사람을 상징하는 캐릭터를 찾아 주는 겁니다.
그 동안 단원들끼리는 오랫동안 겪어 왔잖아요?
그러니까 모두들 다른 단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그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서로 얘기해 주는 건데, 추상적이거나 애매모호하면 안 되니까 영화나 드라마 또는 만화나 소설의 주인공으로 표현해 주기로 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해도 찾기 어려우면 모두가 알 만한 실제인물로라도 캐릭터화하기로 했습니다.
서로를 위해 하는 것이므로 신중하게 선정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모두가 잘 받아들이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 후에 생각할 수 있도록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이제 단원들 모두가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에 대해서 그를 상징하거나 연상되는 어떤 인물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단원들 하나 하나마다 그에 맞는 캐릭터를 찾고 단원 전체의 명단이 적혀있는 종이에다 한 사람 한 사람씩 그것을 적어 나갔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종이에 그렇게 적어 나갔지요.
그러니까 한 사람마다 그를 상징할 수 있는 캐릭터가 30개 가까이 모이겠지요?
그런 다음 몇몇이 그것을 취합하는 시간을 가진 후, 드디어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한 사람당 두 캐릭터 정도로 압축해서 발표를 했는데, 놀라운 것은 단원들마다 똑 같은 이름이 상당수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어느 누가 보더라도 비슷하게 나온다는 얘기지요.
모두들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한 사람씩 발표가 됐습니다.
무기명이니까 너무 진솔하게들 써 놔서 당혹스런 부분도 꽤 있었습니다.
한 사람 마다 두 캐릭터 씩이니까 예를 들면, 어떤 여자 단원 하나는 뺑덕어멈과 재치부인으로 나오고, 어떤 남자 단원은 일용이와 갑돌이로 나왔습니다.
저는 어떻게 나왔을까 굉장히 궁금했는데, 어떻게 나왔을까요?
아마 말씀을 드려도 어린 지체들은 잘 모를 것이고, 지금 40대 이상 정도 되는 분들만 아실 겁니다.
저는 독고 탁과 우디 앨런으로 나왔습니다.
독고 탁은 이상무 씨의 만화 주인공으로서 천방지축의 아이인데 그런 가운데서도 뭔가 그만의 생각이 있는 인물이고, 우디 앨런은 당시 잘 나가는 미국의 영화감독 겸 배우였습니다.
왜 그런 캐릭터가 나왔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한 번 그렇게 나를 상징하는 캐릭터를 알고 나니까 한 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나는 독고 탁이지” 그러면서 그 인물처럼 행동하려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은 어떤 인물과 자기를 동일시 할 때 오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사실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 독고 탁과 우디 앨런은 저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들어간 90년대 초 어느 한 때 창세기를 깊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성경에서 저와 비슷한 이미지의 한 여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는 깊이 동일시 되면서 적잖은 공감과 은혜를 받은 바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그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 인생과 평범한 일상에 있어서 은혜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뭔지도 나오게 되겠지요.
오늘도 말씀 가운데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으셔서 서로 충만케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이고 그녀의 상대역으로는 그녀의 동생이자 야곱의 두 번째 부인인 라헬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대부분이 레아라는 여성에 대해서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를 집중 탐구해 보신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레아는 드러나지도 않고 썩 생각이 많이 가는 여성도 아닙니다.
오히려 라헬에 대해서는, 그녀가 야곱이 사랑했던 부인이고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라는 것 때문에 우리에게 꽤 ‘괜찮은’ 인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라헬은 야곱의 생애 중 중요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어서 성경에 등장하는 횟수로만 보면 언니 레아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레아는 동생 라헬보다 훨씬 더 은혜의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사랑받았던 여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레아의 삶의 궤적을 따라 가다 보면 그녀는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레아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그리 자세하지 않습니다.
창29:17에 보면, 그녀에 대한 아주 짧은 말씀이 나오는데,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이게 다입니다.
눈이 나쁘다는 것 외에는 별로 설명할 게 없다는 겁니다.
반면에 그녀의 동생인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자매를 두고 이렇게 설명한 이유를 아시겠지요?
레아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라헬에 대해서는 곱고 아리땁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침묵엔 메쎄지가 있는 법입니다.
성경에 레아가 못 생겼다는 얘기는 없지만 사실은 얼굴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레아에겐 상처가 있고 열등감이 있지 않았겠어요?
야곱이 자기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항상 라헬에게만 마음을 줍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여자들은 남자에 비해서 센스가 뛰어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시선만 봐도 압니다.
야곱은 언제나 라헬만 쳐다 보는 거예요.
그 괴롬을 아시겠어요?
라헬을 쳐다 보는 시선은 정신을 잃은 그윽함이 있어요.
그런데 자기를 쳐다보는 눈은 정신 차린 예의 바름이 있는 거예요.
상처가 안 될 수 없지요? 정말 문제가 있는 거지요?
거기다가 아버지한테 제안을 할 때도 보면 라헬을 달라고 합니다.
창29:18을 보니까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그럽니다.
명확하게 얘기하잖아요?
“작은 딸 라헬을 위해”
그렇게 비교 당했던 레아는 얼마나 상처받았겠어요?
아마 그 열등감은 마음 속에 불행의 그늘을 한 없이 깊게 드리워놨을 겁니다.
그 7년 동안 라헬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야곱을 보면서 또 괴로워했겠지요.
그러다가 시간이 다 돼서 이제 라헬과 야곱이 결혼하게 되는데, 결혼식 전날 밤 아버지가 레아를 부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라헬을 불러야 되는데 왜 레아를 부를까요?
아버지와 딸 간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를 한 번 추측해 보시지요.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요?
“레아야 레아야, 너도 너 자신을 알리라 믿는다. 거울을 봐서 알겠지만 그 얼굴로는 시집 못 간다. 넌 덤으로 가야 해. 그러니 암말 말고 이 애비가 시키는 대로 해라”
그때는 아버지의 말씀이 절대적인 시대였으니까 말을 안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야곱과 라헬이 결혼한 첫날 밤, 레아가 야곱의 침실로 들어갑니다.
여자에게는 첫날 밤의 환상이 있잖아요?
그 설레는 마음은 일생에 단 한번인데, 그것을 느끼기는커녕 신혼 첫날 밤을 사기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동생 대신 들어가는 자기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여성으로 이것보다 더한 굴욕이 어디 있겠어요?
더 비참한 건 그 다음 날 아침이었겠지요.
고대시대라 밤엔 불만 끄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었겠지만, 날이 새고 모든 게 확인되었을 때 일어났을 소동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야곱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아악! 이게 누구야! 라헬인 줄 알았더니 레아잖아! 나가! 나가!” 그러지 않았겠어요?
화가 났으니까 그냥 나가라 그랬겠어요?
옆에 있는 베개라도 집어 던지지 않았겠어요?
하필이면 입술에 맞아서 흐르는 피를 닦으면서, 눈물 흘리면서 신방을 나오지 않았을까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 아닙니까?
이게 레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저 역시 어릴 때 또래 아이들로부터 이런 일을 수십 번 겪었습니다.
소아마비라고 같이 놀아주질 않는 거예요.
병신 왔다 그러면서 제가 가까이 가려고 하면 막대기도 던지고 돌도 던지면서 왕따를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레아의 이런 비참함을 웬만큼은 압니다.
아마 저 만의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여러분도 어떤 모양으로든 이런 식의 열등감이나, 소외 당하는 것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아파하고 신음했던 적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레아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 모두의 초상인 겁니다.
그렇지요?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자기가 누군가로부터 단절되고 소외됐다는 사실일 겁니다.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정말 잘 치료가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고, 신분을 상승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소외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레아에겐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질 않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야곱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희망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여자로서 가장 큰 행복은 남편의 사랑을 받는 건데, 야곱은 여전히 라헬에게만 마음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레아는 헛된 희망을 키우지요?
그래도 자기가 동생보다 나은 게 하나 있다면, 건강하니까 혹 아들을 많이 낳아주면 자기를 더 사랑해 주지 않을까 생각하고 아이 낳는데 집중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아들을 낳습니다.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짓지요?
‘보라! 아들이다’ 하는 뜻입니다.
둘째를 낳고 시므온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내 기도를 들으셨구나, 이젠 남편이 내게 오겠지…”
그런데도 남편은 관심이 없습니다.
셋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레위라고 짓지요.
레위는 ‘연합하다’란 뜻입니다.
“이젠 남편이 연합해 주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여전히 자기에게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네 번째 아들을 낳을 때까지 헛된 희망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넷째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그 마음에 변화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넷째 유다를 낳으면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넷째 아들 유다는 뜻부터가 다릅니다.
유다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하나님!” 그런 뜻입니다.
오늘 본문 35절 보면 나와 있지요?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녀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엿볼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가졌던 자신의 판단과 추구가 틀렸다는 겁니다.
여전히 남편은 관심도 없고,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남편의 기대에 매달려 살려서는 안 되겠다 결심한 겁니다
그리고는 관심을 하나님 쪽으로 돌린 거지요.
레아의 대략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첫 번째로 나눌 말씀은 바로 이겁니다.
진정한 은혜는,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마음, 그게 진짜 은혜라는 겁니다.
세상의 기대에 대해 그게 고갈되어 버려야 좋은 하나님의 약속이 내게 임하더라는 겁니다.
즉 ‘good’이 고갈되야 ‘best’가 온다는 겁니다.
좋은 것이 메말라야 최상의 것이 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광야를 허락하신 이유가 뭘까요?
내가 좋아하고 내가 의지하는 것들을 다 고갈시키시려는 겁니다.
내 것이 다 말라 버렸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법입니다.
아마도 넷째 아들 낳을 때까지 레아는 이런 걸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게 유다를 낳고는 이제부터는 하나님만 찬양하겠다 그럽니다.
즉 이제까지는 남편에게 사랑 받고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것 다 포기하고 하나님만 찬송하겠다, 즉 그 분만을 의지하겠다 그 얘깁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게 뭡니까?
우리의 진정한 찬양은 우리 힘이 다 빠질 때에야 비로소 나온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열등감으로 찌들린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 내 힘이 다 빠진 지금부터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인생으로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붙들고 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결국은 내 인생이 내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섞이게 됩니다.
내 인생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내가 들어가서 얽히고 섥힙니다.
이게 바로 진짜 은혜입니다.
언젠가 어떤 연출자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캐스팅에 대한 비화를 밝혀 놨더군요.
그 분 얘기가, 연출자들이 늘 고심하는 것은 악역이 아니라 선한 역을 맡길 사람이라는 겁니다.
의외로 선한 배역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거예요.
악역은 웬만하면 다들 한답니다.
눈 크게 보이도록 분장하고 눈꼬리와 주름 몇 개를 그려 놓은 후에 우악스럽게 연기하면 다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한 역할은 좀처럼 연기로서 커버가 되질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뽑느냐 하면, 평소에도 훌륭한 인품과 삶으로서 동료 배우들에게 존경받는 사람들 중에 고른다는 겁니다.
진짜 선한 역은 그의 삶 자체가 그렇게 살아온 사람만이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런 배우들이 연상이 되시지요?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힘 다 빼고, 다 내려놓고 그 분만 의지하고 사귀기 시작하면 그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서 묻어 나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에겐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 녹아 들어가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투에, 그 삶에, 그 인격에 하나님의 마음이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은혜 안에 사는 백성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은혜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은 어떠냐?
자기 힘만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핏대 올려 가면서 늘 충혈된 모습으로 살아 가지요.
라헬이 그랬습니다.
라헬은 실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상태가 훨씬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언니는 아기를 펑펑 낳는데 자기는 못 낳으니까 억지를 부리잖아요?
아기를 못 낳으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 구하고 기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녀는 억지로 아기를 낳으려고 노력합니다.
창30:1~2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뭡니까?
남편한테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형제 여러분!
얼굴 예쁜 여자 좋아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성질이 이 모양입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지요?
아기를 낫게 하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나 콱 죽어 버릴 거야!”
잔소리에 바가지에 투정에 억집니다.
하나님 의지하는 게 없는 사람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괜한 충격 속에 쓰러져 있고, 밤낮 아프다 아프다 그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마디로 성질이 못 되 먹은 겁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우울증이 생기는 겁니다.
우울중의 원인은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자기 욕심대로 안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여야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라헬은 그게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될 텐데 그런 신앙적인 모습을 어디에서고 찾을 수 없는 겁니다.
남편을 다그치다가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잔머리 굴리잖아요.
내가 못 하면 내 종을 집어 넣으면 돼!
이게 말이 됩니까?
야곱인들 내켰겠습니까?
그런데도 라헬의 말을 들은 것은 왜일까요?
라헬을 사랑해서요? 아니지요.
성화에 못 이겨서입니다.
그래서 여종 빌하를 통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이지요?
이름을 지었는데 ‘단’이라고 짓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억울함을 푸심’ 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이름을 그 따위로 짓습니까?
“’억울함을 푸심아’ ! 물 한 그릇 떠 온! 억울함을 푸심아! 소 젖 좀 짜거라! 억울함을 푸심아…”
애가 자기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상처가 되겠습니까?
우리 이름을 이 억울, 김 억울! 이렇게 지었다는 건데…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여잡니다.
정 떨어지지 않습니까?
여종으로부터 또 그 다음 아들을 나았는데 이름을 납달리로 지었습니다.
뭐냐 하면 ‘경쟁하다’ 라는 뜻입니다.
무슨 의도일까요?
“응! 이젠
여러분!
한 번 집에 가셔서 창세기에 나오는 라헬 관련 기사를 자세히 읽어 보세요!
라헬은 단 한 번도 자기 힘을 뺀 적이 없습니다.
악착같이 제 의지로 삽니다.
그러다가 막내 베냐민을 낳고 죽지요.
베냐민이란 이름도 야곱이 지은 것입니다.
라헬은 그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라헬은 그녀의 삶으로 보나 아들 이름 짓는 것으로 보나 신앙적 기미가 전혀 없이 살다가 죽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모르고, 하나님 은혜 또한 뭔지도 모르고, 아무 이룬 것 없이 그냥 죽어 갔잖아요?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게 뭡니까?
내 힘 빼고 하나님 의지 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번 한국에 있으면서 어떤 분이랑 얘기를 하는데, 그 분의 십일조에 대한 생각을 듣고 통탄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약하면 그 분은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하나도 힘이 빠지질 않았더라구요.
분명히 그분의 생각은 말라기
뭐지요?
내가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몇 십, 몇 백배로 채워 주실거야!
이렇게 접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올바른 십일조 정신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손해를 보자는 겁니다.
손해를 통해서 우리의 힘을 빼자는 거예요.
천만 원을 버는데 십일조를 드리면 900만원으로 살아야 되잖아요?
100만원을 손해보는 건데, “그래도 주님 믿고 의지할 수 있어요. 나는 주님 밖에 없어요”
그런 믿음의 표현인 겁니다.
남녀 간의 사랑에도 불리한 조건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래도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 손해와 부담 다 감수할 수 있어!” 그럽니다.
왜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게 사랑의 표현이고 사랑의 출발인 겁니다.
그랬더니 그걸 보시고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셨다 그거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모든 은혜와 권능과 복을 다 부어 주셨다! 이게 순서지, 처음부터 “십일조 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 하는 로또 식의 접근이라면 그게 과연 신앙일까요?
다행히 우리 교회엔 그런 분이 안 계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다들 십일조 하십시오!
그래서 손해보고 힘 빼는 연습을 하세요.
자기 힘 빼고,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하는 모습!
라헬에게는 그게 없었습니다. 은혜가 없었어요.
모두들 라헬이 아니라 레아처럼 힘 빼고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그 분의 은혜 안에 살도록 힘쓰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또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평소의 삶, 일상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게 은혜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다니엘 6:10절을 보니까,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전에 하던 대로’라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게, 왕이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도했다, 그래서 사자 굴에 들어가서 승리했다 이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되기 위한 진짜 필요충분 조건이 뭔지 아십니까?
전에 하던 대로 하는 기도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평소대로의 삶이 있어야 하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평소의 삶이 없다면 다니엘 같은 인생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로 강조하는 게 평소의 삶, 일상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의 삶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특별한 것 바라지 마십시오!
자꾸 자기 속에 특별한 것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병들어 가는 증거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특별새벽기도가 유행입니다.
그런데 특별새벽기도를 하는 이유는 뭘까요?
보통 새벽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입니다.
특새를 통해서 새벽기도를 습관화시키고, 그걸 바탕으로 평소에 새벽기도를 잘 하자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특새가 끝나면 새벽기도 안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언제나 ‘특별’은 ‘보통’을 위한 수업이고 과정인 겁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월초에 월삭새벽기도를 하는 이유는, 한 달에 그날 하루만 나오라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으로써 새벽기도의 의무를 다 했다 그러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통해서 평상시로 옮겨 가야지요.
레아를 보십시오!
그녀의 인생에선 특별 난 게 없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생을 살아갔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섬기고 일상을 성실하게 꾸려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평범한 일상 가운데 은혜를 부어 주셨던 겁니다.
다시 아들 잇사갈을 주시고 스불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복 주셨다, 내가 영원히 그곳에 거하다” 그런 뜻입니다.
그녀는 평범한 삶 가운데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녀는 막벨라 굴에 묻힙니다.
야곱 역시 막벨라 굴에 묻힙니다.
막벨라 굴은 족장들의 무덤입니다.
그렇다면 그 얘기는 뭘까요?
야곱의 진정한 아내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셨다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발작적인 게 아닙니다.
평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게 없습니다.
특별한 게 튀는 것, 그게 은혜인 줄 아는데, 절대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을 지킬 때 능력을 주십니다.
일상의 삶은 권태롭고 지루합니다.
매일 매일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게 은혜고 그게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아기를 낳고 그 애가 숨쉬고, 울고, 떠들고 하는 일상이 축복이라는 겁니다.
“나는 돈이 없어서 자가용이 없어. 그래서 걸어다녀! 그래서 불행해!”
이렇게 얘기할 사람 있습니까?
걸어 다니는 것은 평범합니다.
그런데 그 평범함을 못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나는 맨날 라면만 먹어!
라면이라도 소화시킬 수 있다면 몇 억이라도 쓰겠다는 사람이 한 두 명인 줄 아십니까?
가끔 자매들에게 그런 얘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이곳의 생활이 너무 지루해요, 심심해요!”
그건 복에 겨워 하는 말입니다.
평범하고 지루한 삶이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자꾸만 그렇게 지루해요, 심심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내가 재미있게 해 줄까?” 그러십니다.
어느 날 보니까 라면도 소화가 안 되고, 걸어 다닐 수도 없고, 애기도 안 울고…
재미있겠지요?
바로 그때 깨닫는 게 뭐지요?
평범한 게 복이라는 겁니다.
은혜를 하는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평소의 삶에서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게 레아의 승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주와 함께 동행하는 것, 그게 바로 가장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내 힘 다 빼고 다 내려놓은 후에 주님을 의지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평소의 삶을 열심히 사십시오.!
감사하시고, 기도하시고, 말씀에 깊이 붙들리십시오!
그런 평소의 삶이 지속되는 게 하나님의 주시는 진정한 은혜의 삶입니다.
그렇게 라헬이 아니라 레아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시면서, 또 평범한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을 받아 누리는 새 일 주일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