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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어머니의 소천으로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소천하신 날이 금요일이라 주일을 끼고 다녀 올 수 밖에 없어서 다른 설교자를 모셔야 했습니다. 여러 사정 끝에 고사하는 이성복 사모에게 부탁을 드렸고, 설교문 역시 본인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좋은 말씀이라 생각들어 올립니다. 짧은 시간 가운데서도 열심히 준비해서 필요한 말씀을 전해 주신 이성복 사모에게 감사드립니다 - 최영식 목사)
2010. 5.30 주일 설교
성경 고전 9:19-27 제목 단 한 가지 소원 엉뚱하게도 제가 감히 설교자로 이 자리에 서게 되어 송구합니다. 다들 놀라셨죠? 저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 예배를 받으시러 이곳에 와 계시기 때문에 최고의 하나님께 최상의 예배를 드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변명도, 엄살도 끼어들 수 없지요.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다만 믿는 맘 하나로, 떨리는 다리로 순종하며 나아와 섰사오니 붙잡아 주시고, 주의 성령님 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고 친히 말씀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요즈음 일대일 성경공부는 대략 중반에 다다랐습니다. 대상은 모두 여성입니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는 목소리도 작고 몸짓도 사분사분하여 소리도 잘 나지 않는 분들이십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참 약해보이기까지 하지요. 한 번 이름을 불러볼까요, 선희씨, 미화씨, 시옥씨, 문영씨, 한나 양. 하지만 저는 이 분들에게서 내면에 있는 강력한 동기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일에 대한 부담과 관심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좋은대학에 입학하는 겁니까, 디플롬 획득, 승진, 부자, 몸짱, 세계여행, 카네기 홀에 서는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을 새로 알게 되면 그에게 궁금한 것이 참 많습니다. 해서 답이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추적해가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하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무엇이 궁금한가요. 하나님께도 과연 소원이 있을까요?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 하는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한가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다같이.<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시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개인이 구원을 받는 것, 거룩하게 되는 것 즉 성화를 이루는 것, 예배와 봉사에 힘쓰는 것,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구제와 선교에 힘쓰는 것 등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고 수단이지 목적 자체는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얻고자’라는 단어가 5번 나옵니다. 22절 끝에 가서야 그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힙니다. 바로 ‘구원하고자’입니다. 바울의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바울사도가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 사람, 즉 확실한 내 편을 만들겠다는 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의 사람을 만들겠다는 일념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네 편도 없고 내 편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는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얻는지, 즉 어떻게 해서 사람을 구원하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19절) 누구의 종입니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종은 자기 의지대로 하지 않고 주인의 뜻으로만 삽니다. 그래서 종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방식과 자기 스타일을 포기하고서 이웃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관점이 아니라 상대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이미 자기를 버렸으니 자존심조차 하찮습니다. “아니, 자존심은 우리 생명과도 같은데 그걸 버리라구요? 말도 안돼” 하시겠죠. 네 펄쩍 뛰실 일이지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포기는 자기 자신과의 피 터지는 싸움입니다. 이 한 판 승부에서 이겨야 다음단계가 쉬워집니다. 하지만 비법이 있습니다. 내가 종인 것을 수시로 자신에게 각인시키는 겁니다. 둘째는 연대화 해야 합니다.(20~22절: ‘~와 같이‘라는 말이 4번 나옴) “유대인과 같이,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율법 없는 자와 같이, 약한 자와 같이,” 이 말은 그의 사상이 오해받기 쉬운 아슬아슬한 이야기입니다. 줏대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 그럼 술친구 구하려면 술도 같이 퍼마시고 도둑질도 하라는 말인가 의문이 생길 겁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바울 사도에게는 자기 행동에 대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다같이.<고전 10:31>“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박쥐같은 기회주의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죄짓고 망하는 자리에 함께 있으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연대화 하라는 말은 할 수 있는대로 상대방에게 눈높이를 맞추라는 것입니다. 어른이 아이들과 대화를 하려면 어린이 수준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어린아이더러 네 수준을 나만큼 높이라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어른이 자기를 낮추고 아이에게 다가가면 쉽게 해결됩니다. 키가 큰 어른이 자세도 낮추어야 하고 언어도 수준을 내려야 합니다. 아이 앞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어린이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눈높이를 함께 하시려고 하나님이 먼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주시려고 우리의 수준으로 낮아지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오셔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들과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세상이 미워하고 멸시하는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늘에서 가련한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죄인을 심판하고 벌주는 분으로 머물러 계시지 않고 자기를 비워 우리처럼 되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암송하시는 구절을 볼까요.<요3:16> 앞부분을 읽겠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포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기포기와 연대화로 우리가 먼저 구원받았으니 우리도 이와 같이 하는 게 천만번 옳습니다. 요즘 우리교회 집사님들한테 제가 감동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집사님이 너무 많으니 다 할 순 없고, 음..대표로 한분만 예를 들어볼께요. ex) 노래엔 이 분을 따라갈 사람 없지요. 성가대에서 가르치기 참 답답하실텐데도 당최 화를 안내세요, 얼굴 한번을 찌뿌리는 일 없이 길이 참으시면서 각자의 입장과 수준에 따라 지도해주십니다, 흉내도 잘내셔서 시범을 보이시면 어떻게 하라는 건지 귀에 쏙쏙 들어와요, 들을 땐 알겠어요. 막상 하면 잘 안되긴 하지만. 그래도 매번 잘한다 잘한다 해주시니까 나도 모르게 더 잘하려고 기를 쓰게 돼요. 그죠 철우씨? 그래서 그의 주변엔 늘 사람이 꼬입니다. 보세요, 기적 같은 일들이 성가대에서 마구 일어나고 있잖아요. 마치 자석을 붙여놓은 것 같습니다. 사람을 얻기 위해, 나를 버린 다음엔 내가 상대방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대개는 무너집니다. 모든 싸움과 갈등이 종식되는 순간이자 상대방의 마음을 얻게 되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 단계까지 와서 멈춰버리곤 합니다. 고지가 눈 앞인데 다 온 것인양 긴장을 풀어버립니다. 목적을 상실한 경우이지요. 아쉽게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마지막 단계는 반드시 복음을 말로 전해야 합니다. 앞의 두가지, 종이 되고 연대화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를 위한 것입니다. 종이되어 섬기고 연대화를 잘 했다 손 치더라도 이런 노력 자체가 전도가 되는 건 아닙니다. 복음을 직접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뿐 아니라 사흘만에 부활하신 이유는, 죄를 사할 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시려고 살아계신 주가 되신 거라고.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를 전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다같이<벧전 3:15>이유를 묻는 자에게 항상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여러분, 복음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서둘러 준비하십시오, 온유와 두려운 마음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의 몸 아무 데를 찔러도, 나오는 대답은 오직 한마디 ‘복음’ 밖에 없는 듯합니다. 그러면 그의 무엇이 온 몸을 복음으로 철저히 무장하게 한 걸까요? 바로 자기 훈련입니다. 그 하나는 절제훈련입니다.(25절) 모든 일에 있어서 절제합니다. 바울이라고 옛성품이 없었겠어요? 육신의 소욕이 없었겠어요? 아니예요. 오죽하면 스스로 곤고한 자라는 탄식을 쏟아냈을까요. 언제 넘어질 지 모르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에 더욱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한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유혹하는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훈련하여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너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성찰입니다.(27절) 해가 거듭되어도 복음의 열정이 식지않고 단단히 무장할 수 있는 이면에는 쉬지 않는 자기 진단이 있었다는 겁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놀라운 추진력은 내적 강인함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이 2가지 있습니다. 뭐지요? 네 바로 말씀과 기도이지요. 매일 매순간 말씀으로 내 안을 비추어 정결하게 단장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기도하며 자기를 진단하라는 겁니다. 권리는 사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주신 권리를 최대한 사용하셔서 유익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의 본문에서 핵심되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23절에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여러분, 예배를 잘 드리고 성경공부에 참여하십시오. 그러나 이것만 하지 마시고 축구도 하고 골프도 치고 산책도 하고 같이 차도 마시세요. 자기만을 위해 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만 하지말고, 싫은 사람하고도 그렇게 하십시요.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하십시오.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아직도 교회 안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개인 구원과 성화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자기안일에 빠져 더 이상 전도하려들지도 않고 더 이상 타인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육체적 이기심, 정신적 해이, 도덕적 무감각과 영적 우둔함에 빠진다면 주변의 사람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종으로 사십시오. 눈높이로 연대화 하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말로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위해 평소 말씀과 기도를 무기삼아 끊임없이 자기를 훈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 개개인을 구원하신 분명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입이 되어 또 다른 사람을,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이유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간절하고도 단 하나뿐인 소원을 위해 여러분의 손과 발과 입 뿐 아니라, 여러분의 몸이 기꺼이 뜯어진 빵이 되고 부어진 포도주가 될 용의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각자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바울을 따르는 자는 많으나 바울 사도가 찾아가는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나는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 전공이나 실력수준 등 내 구미에 맞는 사람은 곁에두고 싶어하고, 싫은 사람은 피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에게서 얼마나 먼지요. 하나 뿐인 인생, 이제는 나와 다른 사람도 포용하며 복음을 위해 살다가 마지막에는 바울과 같이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당당하게 고백하며 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이 몸을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