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람: 모두 / 글쓰기: 관리그룹 / 댓글: 정회원 이상
성경 롬
제목 정말 빚진 자라면
형제가 많을수록 사연도 참 많습니다.
지난 번에 우리 형제가 다 모였을 때 그 자리엔 형수님들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셋째 형수님이 제게는 각별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년 만에 대학을 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공부를 안 하다 대입시를 준비하려니 학원엘 다녀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때 당시 부모님은 이미 연로하셔서 저를 돌봐 줄 형편이 못됐습니다.
해서 형님들이 어떻게 해 줘야 하는데 다들 결혼을 했고 형편도 모두들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느 형님한테라도 제 사정을 얘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그 중 셋째 형님이 좀 나은 것 같아서 부탁을 드렸지요.
물론 형님이 허락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게 실제 살림은 형수님이 하시잖아요?
그래서 형님이 고민을 하시다가 형수님께 말씀을 드렸나 봐요.
형수님이 허락을 하셨어요.
해서 그 집에서 학원을 다니면서 재수를 하는데, 집이란 게 달랑 방 두 칸 짜리 연립주택이었습니다.
그래서 방 한 칸에서는 형님 가정이 살고 제가 방 한 칸을 차지했지요. (어린 조카가 둘 있었습니다)
저야 얹혀 사는 입장에서 감사할 것 밖에 없지만 형님 가족은 얼마나 힘들고 궁색했겠어요?
학원비가 매달 들어가야지요, 생활비도 훨씬 더 들지요, 그리고 데리고 있는 이상 용돈도 줘야 되잖아요.
형님은 그렇다 쳐도 형수님과 조카들에겐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엘 들어갔는데, 등록금이 당시 형님네 형편으로는 너무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형님 내외가 제 등록금 때문에 심하게 다투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빚을 내셨는지, 입학금을 내 주셨고 졸업할 때까지도 몇 번이나 등록금을 대 주셨습니다.
그런 일을 생각하면서 이번에 만났을 때, 셋째 형수님을 따로 조용히 불러서 새삼스럽긴 하지만 참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벌써 30년이 다 된 얘깁니다.
그랬더니 형수님은 오히려 그때 저한테 잘 못해 줘서 평생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는 거예요.
저로서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날 저녁에 형님들과 형수님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저는 또 똑같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제가 이나마 한 인간으로서 설 수 있게 됐던 게 형님들과 형수님들 덕분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랬더니 형님들이나 형수님들이나 모두 제게 너무 미안하다는 거예요.
뭐 하나 변변히 해 준 게 없는데 이렇게 목사로서 서 있어주니 너무 고맙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참 그 순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와중에도 우리 가정엔 정말 (표현이 좀 이상할 지 모르지만) 평안이 벼락처럼 임한 것 같은 것 있지요?
정말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혈육의 정이란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돌이켜 보니까 그날 모인 우리 형제들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은 서로에게 빚진 마음인 것 같았습니다.
사실, 세상 사람 모두가 ‘내가 빚진 사람이다’ 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천국은 다른 데가 아니라 바로 거기가 천국일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여기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인생이든 스스로 빚진 자라고 생각할 때 그때부터 꽃은 피고 열매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즉 우리가 왜 빚진 자인가? 그리고 그 마음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 빚진 자로서의 마음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을 두루두루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 깊은 깨달음과 은혜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로마서를 여는 서문에서 자기가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즉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 빚진 자다’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다 알듯이, 그에게는 한때 예수 믿던 사람을 잡아 죽이던 전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그 잘못을 보상하는 길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전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곤 그 마음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쓴 다른 서신서도 그렇지만, 특히 로마서 같은 경우는 복음을 향한 그의 급한 마음이 더 잘 드러나 있습니다.
물이 가득 찬 양동이는 조금만 건드려도 물이 흘러 넘치지요.
그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으로 가득 찬 그는 복음이란 말만 나오면 곧바로 흥분합니다.
그 열정과 열심은 아무도 못 말립니다.
오늘도 로마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다가 복음이란 말이 나오니까 인사를 멈추고 바로 복음이 무엇인지 하는 얘기로 들어가지요.
“이 복음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2~4)
그래 놓고, “아 인사를 하다 말았네! 로마 교회 교인들 당신들에게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러고 있는 겁니다.
이런 열정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복음이 확고하고 영원하기 위해서는 그 복음을 담는 그릇도 더없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제대로 갖춰져야만, 즉 태도가 올바르게 되어야만 열정이든 열심이든 나오게 됩니다.
오늘 저는 바로 그 그릇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그 복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겠어요?
여러 필요충분조건이 있지만 딱 한 가지면 됩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가졌던 그 ‘빚진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갚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있어야 그게 바로 복음을 영원케 하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오늘 좀 두서 없겠지만 그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오던 우리는 무조건 둘 중에 하나의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채권자인가 채무자인가, 즉 빌려 준 사람인가 빚진 자인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진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항상 내가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빌려 주고 못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채권자 의식이지요?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시간으로 환산해서
일은 오후 여섯 시까지인데 마지막에 들어 온 사람은 겨우 한 시간 일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포도원 주인은 그 사람들 모두 다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 씩을 줍니다.
그때 먼저 들어 온 일꾼들이 분노합니다. 불공평하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성경 기사를 읽는 여러분들은 어떠셨어요?
아마 그 내용을 잘 몰랐을 때는 읽는 여러분들조차도 불공평하다고 느꼈을 겁니다.
그런데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시지요.
성경의 메씨지를 읽는 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와 동일시 하던가요?
사실은 우리 중 누구도 내가 마감 한 시간 전인 오후 다섯 시에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알고 보면 우린 모두 다 오후 다섯 시의 인생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은 우리 모습을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갈 곳 없이 서성거리며 오직 하나, 죽음의 운명 앞에서 절망해야 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어둡고도 긴, 춥고 배고픈, 밤 같은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심판의 공포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씀대로 소망도 없고 내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과 저에게 새로운 삶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바로 오후 다섯 시에 왔다가 구원 받은 존재가 바로 우린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주인의 처사에 불만을 터뜨릴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마음을 다져야 하는 것은, 내가 바로 오후 다섯 시에 온 자라는 의식입니다.
그게 있으면 우리는 언제나 감사드릴 수 있고 언제나 은혜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먼저 이런 태도를 갖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하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진심을 다해 그 찬양을 부르셨을 줄 믿습니다.
잘 아시듯이 그 찬양은 노예 상인이었다가 나중에 목사가 된 존 뉴우튼 이란 분이 쓰신 가사입니다.
정말 은혜를 체험한 가운데 나온 깊은 간증이지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변화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채권자 의식을 다 뒤집는 것입니다.
찬양 가사대로 내가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채무자 아닌가? 빚진 자 아닌가?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빚을 갚을 것인가? 고민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때부터 꽃 피고 열매 가득한 주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 있잖아요?
그리고 구원해 주시고 유복하게 세워 주셨잖아요?
때를 따라 공급해 주시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셨잖아요?
그럼 우리는 100 % 다 빚진 자 아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내가 받을 게 있는 양 그렇게 나간다는 겁니다.
신앙생활 할 때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섭섭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충성했는데.. 내가 집사로, 성가대원으로, 임원으로 충성을 다하고 시간과 물질 다 드렸는데 왜 안 알아주고 안 갚아 주십니까? 내가 한 게 있는데 왜 돌아오는 것은 없는 겁니까?” 그런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 가지고 있는 게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즉 신앙을 오직 복 받기 위한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기복 신앙이 왜 나쁜 지 아십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조차도 빚쟁이, 채무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지요?
하나님 빚 안 갚을 겁니까? 언제 갚을 겁니까? 그런다는 겁니다.
“내가 충성한 게 얼만데, 내가 드린 게 얼만데, 헌신한 게 얼만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계십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어 버린다는 거예요.
이것만큼 악한 태도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만큼 악한 신앙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걸 몰라요.
자기 자신은 열심히 했다, 충성 다 했다 그거만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주님의 도구, 주님의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기본적으로 가져야 될 마음가짐이 몇 가지 있는데, 바로 이 빚진 자 의식이 가장 먼저입니다.
우선적으로 시정해야 될 게 이 의식이라는 겁니다.
채권자 의식을 버리고 채무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건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시험이나 고난도 이 마음을 품어야 이겨내기 쉽습니다.
한 번 이 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기복 신앙인가 건강한 신앙인가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뭘 보면 아느냐?
내 마음 가운데 빚진 마음이 큰가, 아니면 채권자 의식이 큰 가 그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채권자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길이 뭐냐?
두 가지 정도를 보겠는데, 그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그게 바로 우리가 가져야 될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채권자는 화를 냅니다.
마음 속에 분노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빌려 준 사람, 빚쟁이는 늘 화를 내지요?
신앙생활 하면서, 교회생활 하면서 자꾸만 화가 나세요?
맘에 분노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적신호입니다.
빚졌다고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 밖에는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자꾸 화가 난다고 하면 그건 마음 속에 자기가 뭔가 받을 게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일만 달란트 받은 사람이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한다면 그 사람이 분노할 까닭이 없겠지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탕감해 준 사람에게 감사해야 됩니다.
그런데 마 18장에 나오는 그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은 그런 의식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 멱살을 잡고 분노하잖아요?
“이놈은 은혜를 모르는 파렴치한 놈이야. 이렇게 질서를 어지럽히는 놈은 감옥에 가야 해!” 그러면서 씩씩 거리잖아요?
그 사람에게 없는 게 뭡니까?
빚진 자 의식입니다.
그때 그 주인이 분노하는 내용을 보잖아요.
우리도 똑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화를 낼 수 있습니까?
의를 위해서 아니면 주의 나라를 위해서 거룩한 분노를 발할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채권자 의식으로 화를 낼 수 있겠어요?
여러분! 우리는 분노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격에 눈물을 흘려야 될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다 누구랄 것 없이 다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분노심이 많아진다면 그건 주님 앞에 더 깨져야 됩니다.
주님 앞에 꼬꾸라져서 회개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아야 되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감격이요, 은혜요, 감사입니다.
같은 우리 교인 얘기라 공개적으로 말씀 드리기가 좀 뭐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좀 하고 싶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저보다 더 이 교회에 오래 계신 분들이 최집사님 이집사님 내외분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 가장 많이 고생을 하신 분들일 겁니다.
오늘 말씀 식으로 하자면 채권자 의식을 가장 많이 가져도 될 분들이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이때까지 두 분이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오래된 교인으로서 어떤 기득권을 행사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구질구질한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 십상인데 두 분한테는 제가 그런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늘 뒤에 온 사람들이 맘껏 일하도록 소리 없이 비켜 나 줍니다.
그리곤 성가신 일들은 자기들이 다 처리를 합니다.
그리고 재정을 보면서도 가끔 저나 교인들이 영수증 없이 지출을 하다 보니까 장부와 현금이 안 맞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연말에 가서 그냥 결손 처리를 하라 그래도 꼭 자기들이 메꿔 놓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되어지는 일이 항상 감사하다 그래요.
뭐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빚진 자라는 의식을 늘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 희생과 헌신에 대해서, 그리고 늘 감사하고 빚진 자 의식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분명히 복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으면서 화내지 마십시다.
내 속에 분노가 끓어 오르는 그 마음을 방치하지 마십시다.
“내가 주님께 받은 게 얼만데 내가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바로 빚진 자인데 이럴 수는 없지”
이게 우리가 품어야 될 마음가짐입니다.
아무쪼록 분노가 아니라 감사와 감격이 있는 주의 자녀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빚진 자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처음의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채권자 의식이 있는 사람은 처음 시작 할 때 가졌던 그 감사가 다 사라져버리고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얘기로 돌아가서, 네 종류의 품꾼들 중에 누가 제일 감사하겠어요?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선 언제 들어와서 일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더 귀하게 보신다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사람들 역시 놀고 서 있던 사람들이라 그랬습니다.
또 그들의 입에서 ‘쓰는 사람이 없음이니이다’ 고백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한 시간을 일 했는지, 다섯 시간을 일했는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예요?
놀고 서 있는 사람을 써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 자체가 그 당시엔 정말 감사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건 싹 잊어 버리고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많이 일했는데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해? 왜 이거 밖에 안 줘? 그러면서 감사를 다 까먹어 버리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 집이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가끔 어려운 친척을 도와 주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한 자리에서 몇 사람에게 돈을 주시는데 액수가 다 다르더라구요.
오늘 말씀대로라면 좀 덜 받은 아저씨들이 불만을 터뜨려야 되잖아요?
그런데 당시에는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다들 수긍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그 아저씨들끼리도 얘기하는 것을 듣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분들 중에 더 어려운 분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어려운 분들한테는 아버지가 조금 더 드린 겁니다.
모든 사람의 상황이 항상 똑같을 수는 없잖아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인이 주는 게 얼마든 공쳤어야 될 내가 한 데나리온이라도 받아가는 것에 감사 드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에게 늘 비교의식을 줘서 시험합니다.
그래서 감사를 진공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듯 싹 뽑아가 버립니다.
거기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이 만큼이 필요해서 이만큼 주신 것이고 저 사람은 저 만큼이 필요해서 저만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내가 받은 것은 싹 잊어 버리게 하고 비교의식을 통해서 우리의 감사를 다 고갈시켜 버립니다.
거기에 빠지면 안됩니다.
그건 우리 아버지를 불신하는 것이고, 우리의 무지이고 어리석음의 소치입니다.
초창기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다 가 지금 이대로도 감사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힘이 뭐였습니까?
변화산 상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봤습니다.
바울이 힘이 뭐였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화신 예수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처음 그 감격했던 감사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습니다.
그 초창기의 시작을 결코 지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거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역시 우리가 처음 예수 믿고 구원 받았을 때의 그 감격과 감사를 잊으면 안됩니다.
그 초심을 다시 되새길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난 그 사건을 사도행전에서 세 번, 서신서에서 세 번, 도합 여섯 번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지요?
출발을 생각할 때 감격이 넘치고 그래서 빚진 자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감사의 표현입니다.
분노하지 않고 감사하는 모습을 통해서 내가 항상 빚진 자라는 의식을 갖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바로 진짜 신앙이고 그게 바로 우리를 통해 확인하시고 싶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로마서를 폈으니 복음의 비밀과 복음의 진수를 전해야 됐는데, 겉만 훑었습니다.
하지만 능력있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담는 우리들의 태도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드렸습니다.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분노와 불평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평생 감사로 처음 사랑과 감격을 잊지 않고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선교는 그래서 세계를 뒤집을 만큼 강력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 빚진 자의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기도는 힘있어지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강력해지는 법입니다.
그럴 때 우리 삶 역시 더 풍요롭고 활기 찬 인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빚진 자라면, 이제 여러분의 태도를 바꾸십시오!
분노를 감사로 바꾸고, 매일 매일이 그저 그런 우리의 일상을 처음 시간으로 돌립시다.
초심 때의 그 감격을 부활시킵시다.
우리 이 시간 다같이 옆 사람에게 이렇게 고백하십시다!
“나는 빚진 자입니다. 감사할 것 밖에 없어요”
“나는 빚진 자입니다. 정말 이 사실을 잊지 않을게요!”
오늘 이런 마음을 품고 사시는 여러분에게 우리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에게 주셨던 그 모든 복을 우리에게도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오늘도 빚진 자로서 마음을 다지고 초심으로 재출발하는 저와 여러분의 생애가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