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0

 

성경 삼상22:1-2, 5:25-30

제목 신부단장의 때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1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이지만 올해는 예년보다 더 특별하고 의미 있는 해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8 이라는 숫자가 주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만 18세가 되면 완전한 성인으로 인정하지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본인 서명 하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 역시 지금까지는 미성년 교회였는지 모르지만, 올해 18주년을 맞이하면서는 정말 모든 면에서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어른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교회 창립 18주년을 맞이한 모든 형제 자매 여러분들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자 다윗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이름이 퍼졌고, 그 뒤로도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승승장구했습니다.

여인들이 주축이 된 펜클럽도 생겼습니다.

"사울은 천천을 죽이고 다윗은 만만을 죽였도다" 노래하면서 그 노래를 입에서 입으로 퍼뜨렸습니다.
사울 왕이 좀 배짱 있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불행히도 그렇질 못했습니다.

자기가 발탁한 소년이 대장부로 장성해 가는 모습을 보면 대견해 하고 뿌듯해 했어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질투의 화신이 돼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자기의 온 정력을 다 소비합니다.
저는 '사울왕!' 그러면 '불순종 그리고 한 사람 죽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산 사람' 그것 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
왕으로서는 너무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 또한 왕이 되기까지는 주로 도망 다니는 게 일이었습니다.

사울을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데 이골이 난, 아주 고단한 인생이었습니다.
도망 다니다 보니 때로는 국경을 넘어 원수의 나라 블레셋까지 도망가기도 하고 또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미친 척도 해야 했습니다
.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하게 된 도피처가 어디였냐 하면 아둘람 동굴이었습니다
.
아둘람은 블레셋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의 변방으로서 석회암 동굴지대였습니다
.
아둘람 동굴의 이 "아둘람"이란 뜻 자체가 '피난처, 안전지대'란 뜻입니다
.
실제로 이 지역은 동굴이 수백, 수천 개가 널려 있어서 여기에 숨으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
다윗이 여기 있다는 소문이 나니까 다윗의 가족뿐 아니라 별별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사울의 통치 아래서 웬만한 특권층이 아닌 다음에야 국민들 대다수가 고통을 겪었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
가진 자들의 착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빚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교육기회가 없어서 무식해서 사기를 당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가족 중에 누가 아파서 할 수 없이 도둑질을 하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이유로 돈을 빌리고는 갚지 못해서 빚쟁이가 된 사람들 등등도 모여 들었습니다.

사울 왕이나 특권층들이 보기에는 정말 쓰레기 같은, 구제불능의 사람들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여서 얼마나 됐냐 하면 400명 정도라고 했습니다.
400
명이라고 하면 보통 무리가 아닙니다
.
다윗은 여기에 우두머리가 됐다고 했습니다
.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착하고 교육을 잘 받은 사람도 400명 정도가 모여서 같이 살자면 보통문제가 아닌데, 지금 이곳은 난민촌 수준입니다.

한 마디로 제 멋대로입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됐냐 하면 이 아둘람 동굴이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인재들은 거의가 다 이 아둘람 출신 중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아둘람 동지들은 다윗 왕과 끝까지 생사를 같이 하게 됩니다.

물론 중간에 배반한 사람도 있지만 중심인물들은 끝까지 고락을 같이 했던 것입니다.

 

오늘 저는 교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둘람 동굴 사람들을 서두로 꺼낸 이유는, 아둘람 공동체야말로 아주 좋은 교회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 교회에게는 더 없는 모범이 됩니다.
성경은 아둘람 공동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끌 만한 그룹이 됐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
우리가 추측하는 수 밖에 없는데 무엇보다 그들은 서로 훈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

세상에서 제일 힘든 훈련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사람이 함께 살며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은 정말 어려운 훈련입니다.
우리가 2007년도에 23일 동안의 수련회와 1 2일의 선교여행을 하면서 같이 지냈는데, 그때는 기간도 짧고 환경도 너무 좋았기 때문에 좋은 추억이 됐지만, 그게 아니라 기약도 없이 우리가 다 매일 같이 살아야 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문제는 달라집니다.

 

오래 전에 제 여자 후배 둘이 같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난다기에 너희 둘이 가는 것은 고려해 봐라 하면서 말렸습니다. (제가 그 두 사람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둘 다 개성이 강한 친구들이었는데 결국 방학이 끝나서 보니까 서로 상종도 안 했습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 보니까 두 달 예정에 이주일 만에 로마에서 헤어졌다고 하더라구요.
함께 살고 함께 행동하는 훈련은 그렇게 어렵습니다
.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 훈련입니다
.
왜냐하면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자기를 바르게 본다는 게 어렵지만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  
얼마나 이기적이고, 참을성이 없고, 사랑이 없고, 교만한가 등을 깨닫게 되지요
.

아둘람 사람들은 모두 다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다는 거지요
.
그래서 여기서만큼은 상처를 입지 않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
그러나 그게 어디 맘대로 됩니까
?
아마도 이 사람들은 조그마한 일에도 참지 못했을 겁니다.

식사당번이 다른 사람은 고기 두 점을 주는데 자기한테는 모르고 한 점을 줬더라면 당장에 팔을 걷어 부치고 싸웠을 겁니다.

아마도 서로간에 매일 피 터지는 싸움을 했을 거예요.
공동체 전체가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니, 피해를 당하는 기미만 보여도 참지 못하는 겁니다
.

현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
교회에서만큼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고 교회를 다닙니다.

교회오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그렇게 됩니까?

같이 있다 보면 또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 상처가 깊으면 결국 교회를 떠납니다
.

여러분!
상처를 받았다고 교회를 떠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디를 가든 상처받을 일은 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만 상처받은 것 같지만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될 것은, 교회는 의인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둘람 동굴에 있는 사람들처럼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서로 비비면서 모난 곳을 다듬어야 될 곳이 교회입니다
.

다윗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
매일 사백 명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
아마도 매일 싸움 말리고, 얘기 들어주고, 화해 시키는데 자기 에너지를 다 소진했을 것입니다
.
오늘 저는 교회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그 단서를 아둘람 동굴에서 찾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

먼저 거꾸로, 교회 아닌 것을 살펴보십시다.
아둘람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보면 됩니다
.

먼저 아둘람 동굴은 지식을 배우는 데가 아니었습니다
.
아둘람은 학교라기보다는 훈련장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지식도 배우지 못한 것이냐 하면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 훈련을 받다 보면 스스로 터득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산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을 넣어주기 위해서 아둘람 동굴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
현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
교회는 지식을 배우는 데가 아닙니다
.
물론 우리가 성경에 관해 일목요연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참 좋겠지요
?
그러나 사람이 지식에만 치우치면 실천력이 없어집니다
.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
그렇지만 둘, , 열을 배우면 그만큼 실천력은 약해집니다
.
차라리 초대교회 교인들이나 핍박 받는 성도들처럼 몇 절을 알더라도 그 말씀을 믿고 거기에 헌신하고 순종하는 것이 휠씬 낫지 않겠습니까
?

또 아둘람 공동체는 친교를 위한 그룹이 아니었습니다
.
이 사람들이 이곳에서 해야 될 일은, 친교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역이 되기 위해 자기를 깎아내는 곳이었습니다
.
물론 친교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친교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은 아닙니다
.
친교란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뜻입니다
.
사람이 얼마나 가까워지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는데 부부가 되면 늘 함께 있어야 하고, 늘 함께 일해야 하고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
그건 아닙니다
.
부부가 하나라는 것은 서로간의 신뢰가 견고하다는 뜻입니다
.
만일 부부가 언제나 붙어 있어야 한다면 이것만큼 고역도 없을 것입니다
.
부부약사가 이혼률이 높다는 것이 이걸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매일 똑같은 얼굴을 본다? 이건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
아무리 예뻐도 가끔 봐야 예쁘지 자주 보게 되면 예쁜 것도 그러려니 합니다.

원래 너무 가까우면 마찰이 일어나고 상처를 받습니다.
교회에서 보면, 사람과의 관계가 강해지면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
그러므로 친하게 지내되 너무 가까우면 신앙에 손실을 가져옵니다
.
아둘람 동굴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친교는커녕 초창기엔 그곳에서도 여느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싸움과 약탈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
훈련을 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생겼을 것입니다
.

또 아둘람 공동체는 구제 기관이 아니었습니다
.
어쩌면 아둘람 공동체만큼 구제에 힘쓴 그룹도 드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그렇게 살아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동족을 도왔을 것입니다.
실제로 블레셋이 유대민족인 그일라의 타작마당을 치자 이 아둘람 동지들이 가서 대신 싸워줍니다.

그래서 일년 농사지은 곡식들을 그대로 잘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구제 기관이 아니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구제를 합니다
.
구제는 교회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구제 기관은 아닙니다
.
교회의 존재 이유가 구제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
아둘람 공동체가 이웃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와주었지만 그것이 존재목적은 아니었습니다
.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
다윗 개인으로서는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한 곳이 아둘람 동굴이었고, 사백 명의 지명수배자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사관학교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

신약에 와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신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다윗의 공동체 역시 이스라엘이라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신부 단장하는 곳이 바로 아둘람 훈련소였던 것입니다
.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 에베소서의 말씀은 부부 사이의 관계를 말씀하면서 또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아내를 사랑하듯 이 땅의 교회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티나 주름 잡힌 것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부된 교회가 어떻게 단장을 해야겠습니까
?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교회란 어떤 건물이나 처소가 아닙니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그 모임자체가 교회입니다.

더 축소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어떻게 신부단장을 해야겠습니까
?
다윗이 오합지졸같은 아둘람 동굴의 동지들을 어떻게 훈련시켰겠습니까
?
우리는 오늘 그것을 눈여겨 봐야 할 것입니다
.
그 근거는 오순절 후 시작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됩니다.

놀랍게도 아둘람 동굴의 사람들이 그 훈련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둘람 동굴에서의 훈련 커리큘럼이 어떤 거였는지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의 그 아둘람 출신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제일먼저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참는 훈련, 서로 양보하는 훈련을 시켰을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희생과 끝없는 인내가 있었겠죠.
그리곤 각론으로 들어가서, 무술을 연마하게 하고, 전쟁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케 하고, 재능에 따라 사람을 배치하고, 무엇보다 팀웍을 이루는 훈련을 쌓았을 것입니다
.
그런 과정을 모두 겪은 후에는 그들 모두가 용광로에서 새로 나온 정금처럼 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용장(勇壯)이 된 것이지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교회에서 그런 훈련을 쌓아야만 합니다
.
아둘람 공동체가 겪었을 그 과정을 우리도 다같이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
모두 다섯 가지입니다
.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하기 위한 다섯 가지의 신부단장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준비되어야만 우리 교회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흠 없고 아름다운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예배, 전도, 교제, 봉사, 교육입니다
.  

저는 오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예쁘게 단장해야 될 이 다섯 가지 내용을 간략 간략하게나마 살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예배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생략하려고 합니다.

그 동안 제가 가장 많이 그 중요성과 소중함에 대해 강조한 게 예배였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예배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또 드린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겠지요?

그래서 그냥 넘어 가겠는데, 다만 세계적인 정신위생학자인 데이비드 핑크 박사의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중요한 것이 심리적인 안정이라는 것이 그 주된 내용입니다. 
정말 그렇지요
?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사람이 정치하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가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 사람이 경제를 주름 잡아 보십시오.

나라의 경제가 곤두박질 치게 돼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사람이 가르쳐 보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그 내면에 정서적인 평안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이 평안을 우리가 균형 있게 유지하려면 4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
우선은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일을 해야 사람이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는 놀아야 된대요. 쉬어야 된다는 겁니다.

적절한 쉼이 없이는 안정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또 하나는 사랑해야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랑의 울타리에서 살아야 마음이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합니다
.
예수를 안 믿는 불신자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잘 들어 보세요
예배는 다른 세 가지, -일하는 것, 노는 것, 사랑하는 것-을 위한 기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
왜 그럴까요?

예배라는 것은 초월자 되신 하나님에게 자기를 기대는 것입니다.
겉으로
자신 있다. 젊다. 실력 있다고 아무리 스스로 소리쳐도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내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자주 느낍니다.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속으로 얼마나 떨고 있는지를 자주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절대자가 필요합니다.

가끔, 아니 자주 그분 앞에 나와서 어린애가 엄마 품에 기대듯이 조용히 그분에게 기댈 때에 마음에 안정이 찾아옵니다.

평안이 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예배가 이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 신학자인 슐라이어마허가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묘한 말을 했습니다.

교회는 전적으로 의지하는 감정이다.
예배 드리는 자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지할 때 느끼는 감정이 교회라고 말하는 거예요. 일리가 있는 대답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꼭 기억하십시오
.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일 예배를 얼마나 정성을 다해 드렸습니까
?
여러분 가운데는 몸이 아픈 데도 이 시간을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 이 자리에 나온 분들도 계십니다.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다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예배를 어느 정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살았습니까?
그것을 등한히 하게 되면 여러분의 가슴에는 불안이 있습니다.

공포가 있고 좌절이 있습니다.

예배는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신부 수업을 위해서 성도들과 교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
교회는 예수님 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분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신앙은 절대로 혼자 유지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떠나면 우리 신앙은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일컬어서 성도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공동체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교제를 나누며 서로가 살아야 합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암세포는 혼자 노는 세포라고 합니다
.
우리 몸에는 수백, 수천 만 개의 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이 세포는 모두가 몸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합니다.

모두가 몸을 위해서 함께 힘을 합해 건강을 유지하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암세포가 몸에 생기면 이것은 혼자 논다고 합니다.

혼자 놀면서 세력을 확대하다가 나중에는 악성종양을 만든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몸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게 아니라 몸에 있는 자양분을 끌어다가 뺏어서 자기가 먹는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몸을 망치게 만들고 생명을 앗아갑니다.

혼자 노는 세포가 결국은 몸을 망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교제해야 합니다.

또한 서로 소외감을 받지 않도록 두루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고통을 느끼는 신경과 추위를 느끼는 신경은 있어도, 쾌감을 전달하는 신경은 없다고 합니다
.
그러면 우리 몸은 언제 즐거움을 느낄까요?

우리 몸에 있는 세포가 모두 하나가 돼서 협력할 때 그게 체험된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서로 아름답게 교제하면서 모두가 예수님의 몸된 교회, 예수님의 신부된 교회를 위해서 협력하고 교제할 때, 거기에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사실은 믿는 이들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게 전도입니다.

힘은 들지만 그만큼 기쁨도 큰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직접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생활 가운데 믿는 자로서 기쁨을 보여주고 모범을 보여 줄 때 주변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고 싶어할 것입니다.

제가 한 시옥 집사님네가 처음 나오셨을 때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한 집사님네는 평소에 이 지선 집사님과의 친분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의 인도로 우리 교회엘 나오셨는데요. 

그런데 만약 평소 이 집사님이 한 집사님 보시기에 별로 좋은 인상을 못 주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집사님이 ! 내가 저 언니네 교회엘 왜 가?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만약 한 집사님네가 다른 교회엘 갔다면 병욱 형제와 영균 형제까지 무려 여섯 명 아닙니까?

그러니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평소 믿음생활을 잘 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전도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서로 섬기는 봉사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신부된 교회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자기 눈높이로 남을 내려다 보고 교회 생활하면 안됩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혹은 그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그들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다른 지체들을 생각하며 섬기는 형제자매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제가 몇 번 말씀드렸지요?

요즘 한국에는 서비스업소에서 주문을 받을 때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업소가 많습니다.
처음 그것을 대하는 손님들은 오히려 당황한답니다.

"이거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있나?"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업소 사장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
손님과 눈높이를 같이 하면서 주문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
그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가지고 고객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
저도 한 번 그렇게 대접받고 싶습니다
.
뻣뻣하게 서서
뭐 드실래요? 하는 것 보단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돈 벌려고 하면서도 저렇게 무릎을 꿇고 아우성들인데, 예수님의 신부로서 아름답게 주님 앞에 설 날을 기다리면서 수업 받는 우리가 뻣뻣해서 되겠습니까
?
봉사해야 됩니다
.  

마지막으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 말씀을 배웁니까?

그리스도를 닮는 완전한 자로 성숙하기 위함입니다.
배우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만년 갓난아이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
여러분! 무식한 신부를 좋아하는 신랑이 어디 있습니까
?
날마다 철없는 짓만 하는 신부를 좋아할 신랑이 어디 있냐구요
?
예수님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골치 아픈 사람이 만년 갓난아이입니다.
날마다 신경 써 주어야 됩니다.

기저귀가 젖었는지 안 젖었는지 날마다 봐 줘야 됩니다.

기저귀를 갈 때마다 토닥토닥 베이비 파우다를 발라 주어야 됩니다.

우유가 뜨겁지 않도록 적당한 온도를 잘 유지하면서 젖을 먹여 줘야 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만 교회 안에 가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교회가 신생아만 가득한 산부인과 병원처럼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교회에서는 자라야 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향해서 주님처럼 닮아가기 위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 14절에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
저는 보다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성경공부를 여러분들과 하기를 원합니다
.
그러자면 여러분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셔야 될 겁니다
.
배우십시다.

그렇게 배워서 남 주는 것, 이렇게 배워서 신랑께 바치는 것, 이것이 신부수업인 것입니다.

이상 우리는 5가지를 해야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이 신부수업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가운데는 혼란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
'
이거 날마다 교회 와서 살아야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
그렇지 않으면 '무슨 재주로 그 다섯 가지를 다 잘하면서 사회 생활을 하라는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드실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혼동하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손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른손이고 하나는 왼손입니다.
각 손마다 손가락이 다섯 개씩 있습니다.

오른손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장애자입니다.
왼손만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장애자입니다.

둘 다 써야 정상입니다.
그러면, 오른손이 무엇일까요?

방금 제가 말씀 드린 예수님의 신부 되기 위한 다섯 가지입니다.
예배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섬기는 것, 교제하는 것, 배우는 것입니다.

이 다섯 손가락이 있는 오른손이 바로 그런 삶을 사는 삶입니다.

그러면 왼손은 무엇일까요
?
우리는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만 가지고는 못 살잖습니까
?
이 다섯 가지만 하면서 어떻게 삽니까?

만약 이것만 가지고 내내 산다고 하면 그 사람은 가정도 포기해야 되고, 사회생활도 포기해야 될 것입니다.

날마다 교회만 가서 살아야 될 겁니다.

오른손의 다섯 가지를 하면서 동시에 왼손이 하는 다섯 가지가 필요합니다.

뭐지요?
먹고 마셔야 합니다.

일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자야 합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또 뭐가 있습니까?

즐겨야 합니다.

쉬기도 하고 즐거워하는 게 있어야 능률이 오르지 않겠어요?

이 다섯 가지를 해야 우리가 건전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둘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오른손은 전혀 무시해 버리고, 왼손만 계속 신경을 쓴다면 그 사람은 불신자와 똑같습니다.

그렇다고 오른손만 쓰고 왼손만 쓴다면 이 사람은 광신자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단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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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잘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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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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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 중에 어느 손을 자주 씁니까?

오른손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왼손잡이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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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른손을 우리는 자주 씁니다.

하나님도 오른손잡이 입니다.

하나님도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잡고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른손을 많이 쓰십니다.

오른손이 왼손 보다 더 힘이 있습니다.

오른손이 항상 앞섭니다.
오른손이 제대로 제 몫을 감당할 때 왼손이 따라가면서 다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원리를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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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신부인 교회 성도로서, 오른손에 해당하는 것을 우선에 두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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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오른손에 있는 것을 강조하십시오.

오른손에 더 신경을 쓰면서 정성을 다 하십시오.

그러면 왼손은 자연히 따라 옵니다.
오른손은 우리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것이고 왼손은 우리의 겉 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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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은 우리의 속 사람을 예수님의 신부처럼 아름답게 갖추게 하는 것이고, 왼손은 우리의 겉모양 즉 인간으로서의 몸을 완전하게 갖추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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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른손이 항상 우선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
교회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 받는 신부가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신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고 기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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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아둘람 동굴에 있던, 세상에서는 범죄집단이요,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그들도 이런 훈련을 다 거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대 제국을 이루는 이스라엘의 영웅들이 다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그런 훈련 받기를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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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이런 신부단장을 하는 과정이 힘들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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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기쁨도 있고, 즐거움도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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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신부로서 더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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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두가 이런 훈련을 기꺼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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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거울을 보고 예뻐진 자기 모습에 황홀해서 덜컥 기절해 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창립 18주년을 맞은 지금이 바로 우리 교회가, 나 자신이 예수님의 신부로서 단장 해야 될 때입니다.

우리 비엔나 감리교회가, 그리고 여러분 하나 하나가 그렇게 단장해서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듭나게 되기를, 그래서 늘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쁨 가운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