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람: 모두 / 글쓰기: 관리그룹 / 댓글: 정회원 이상
성경 단3:13~18
제목 우리도 신앙고백을
자닌 데케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수녀였는데 수녀원에서는 시스터 스마일로 불렸지요.
이 수녀가 수녀원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노래를 하나 만듭니다.
‘도미니끄’라는 노래인데, 도미니카라는 성인이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갔다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뜻밖의 반응을 일으키지요.
수녀들은 물론, 수녀원 밖에까지 퍼져 나가서 얼마 후에는 음반으로까지 만들게 됩니다.
그리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데요, 그 음반은 빌보드 차트에까지 올라가서 당시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그룹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까지도 밀어내고 당당 1위를 차지합니다.
그게 1967년이었는데 그 당시에 500만장이 팔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한 번쯤은 그 노래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 수입으로 그녀가 있었던 수녀원은 아름다운 예배당을 짓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녀는 음반업자들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정식 가수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 시스터 스마일이 어디서 무너지냐 하면, 피임약을 찬양하는 노래를 하면서부터입니다.
‘피임약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기 낳는 것을 맘대로 조절할 수 있으니 이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선물이 어디 있으랴’ 하는 내용인데…. 아니지요?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겁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녀를 파문합니다.
물론 그녀는 이미 수녀원에서 나온 후였습니다.
그리곤 그 뒤로 내는 음반마다 실패하고, 나중엔 도미니끄 음반에 대한 세금까지 얻어 맞습니다.
결국 동성연애자인 자기 애인 여자와 외상으로 산 수면제를 먹고 자살합니다.
그 시스터 스마일에 관한 얘기가 최근에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휴머니즘 차원에서 본다면 자유와 사랑을 갈망하는 한 페미니스트의 얘기로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믿음의 차원에서 본다면,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비참하게 인생의 막을 내렸던 불행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나 그녀를 통해서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하나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할 때부터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아담과 하와가 불행해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창조해 놓으신 세상에서 그저 누리면 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하나님과 정면대결을 합니다.
그러자 그들에게는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사울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발탁된 왕이지만 전쟁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셨고, 또 사무엘이라는 걸출한 하나님의 사람이 옆에 있는 이상, 그의 왕국은 자자손손 이어질 것이었습니다.
불행해질 아무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릅니다.
그때부터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불행해진다면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할 때일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늘 생각해야 될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결코 떠나지 않을 뿐 아니라, 누가 봐도 그 분의 뜻을 정면으로 대결하는 짓 같은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되겠다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마음만 가지고, 다짐만 가지고 되느냐 하는 겁니다.
어제 다들 축구를 보셨을 텐데, 선수들 모두가 “우리 이 게임 반드시 이기자!” 약속을 한다 해도 그것만 갖고 이길 수는 없는 겁니다.
구체적인 작전을 짜고 그에 따른 싸움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약속하고 다짐한다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분명히 믿고 그대로 실천해야 될 게 있다는 겁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다니엘서를 보면서 그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도 말씀 가운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다니엘서에는 세 명의 젊은이들이 나옵니다.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은 다 유대 소년으로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의 친구들이지요.
바벨론에 오면서 이름도 사드라, 메삭, 아벳느고로 강제 개명 당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젊은이들의 모습을 자세히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이들은 믿음으로 생명을 건졌고, 그것 때문에 당시 이방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얘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꿉니다.
당시 대 제국을 이루고 있었던 바벨론 안엔 인재들이 많았습니다.
박사들, 점성사, 무당 등이 총동원돼서 왕의 꿈을 해몽하는데, 문제는 왕이 꾸었다는 꿈의 내용을 왕 자신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너무 흉몽이라 끔찍한 기분만 들 뿐이지 그것 외에 기억나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제 아무리 똑똑한 해몽가라 하더라도 꿈이 뭔지 꿈 꾼 본인도 모르는데 그것을 해석할 길은 없겠지요?
이때 다니엘이 나서지요.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왕이 꾼 꿈이 어떤 거였는지 기억나게 해 주고, 해석까지 해 줍니다.
그 해석은, 인간이 만든 나라는 금방 다 무너지고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만 세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 누구라도 다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야만 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다니엘의 이 말을 받아 들이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 일 후에 다니엘은 일약 바벨론의 총리가 되고, 그의 천거로 세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도 각각 지방을 통치하는 지방장관이 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왕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이방신을 섬기기로 작정합니다.
아마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지상에서 영원히 존속되어야겠다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걸 염원하면서 신상을 만드는데 그 크기가 높이 30 m, 너비가 3 m 정도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그 신상 전체를 금으로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절하게 했습니다.
만약 절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 엄포를 놓지요.
당연히 다니엘과 세 친구는 여기에 응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절하지는 않는 것을 발견하고 왕에게 고자질을 합니다.
왕은 난감했습니다.
물론 화도 났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도 아끼는 인재들인데 법에 따라 그들을 용광로에 던져 넣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러다 간곡히 권하지요.
이제라도 절하면 살려주겠지만 못 하겠다면 풀무불에 던져 넣을 수 밖에 없다, 너희들이 믿는 신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그 뜨거운 불 속에서 건져낼 수 있겠느냐 그럽니다.
그때 이 세 친구들이 왕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세 가지였는데, 첫째, 우리는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풀무불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셋째, 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죽겠다 그럽니다.
오늘 우리의 숙제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려면 이들이 했던 신앙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그들이 한 말 하나 하나를 씹어보고, 그들이 고백한 것을 우리도 그대로 따라 해 보는 겁니다.
말씀 가운데 여러분의 믿음도 회복되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의 신앙고백 첫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를 나쁜 형편으로 이끌었던 것을 잊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지금 요 모양 요 꼴로 만든 원인을 잊어버리고 다시 똑같은 일을 저지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를 낙심케 하고 절망케 했던 것을 돌이켜 보시지요.
물론 그 중엔 주님께서 우리를 견고케 하시려고 일부러 주신 고난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바로 이 첫 번째 문제, 하나님보다 특별 나게 사랑하는 게 원인이 돼서 불행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아무리 소중한 돈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도, 아무리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그 사랑의 부피가 하나님 사랑보다 더하면 그건 다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게 되고, 언젠가는 그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와서 자기를 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 친구는 그걸 잘 알았습니다.
지금 자기들이 왜 이방 땅인 바벨론에 있습니까?
왜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왔습니까?
유다가 B.C(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망해서 주전 587~539년간, 약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합니다.
한 번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기록된 예언서들을 읽어 보시지요.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 미가, 하박국… 이런 성경인데 그 내용이 뭡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얘기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지 않으니까 결국은 망하게 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간 겁니다.
그리고 포로기가 끝난 후에 써진 성경이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학개, 말라기 등인데, 거길 읽어보면 다시는 우상숭배했다고 선지자들이 야단친 내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깨달은 게 뭡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게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그건 파멸이고 불행의 시작이구나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느부갓네살 왕 아래 있는 그 세 친구도 생각을 한 겁니다.
우리가 지금 우상숭배한 것 때문에 여기 잡혀와 있는데 다시 또 우상에게 절하라고?
그건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도박으로 망한 사람이 또 도박하겠습니까?
술로 간을 망친 사람이, 담배로 폐를 망친 사람이 또 술 먹고 담배를 피우겠어요?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길게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인생 전체를 통해서든, 아니면 생활 가운데서든 하나님 신앙보다 더 비교우위에 있는 게 있다면 다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사는 게 능사가 아니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느냐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믿는 그 믿음 가지고, 우리가 오래 전에 선물 받은 구원의 그 감격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또 나를 통해 그 구원이 다른 이에게까지 퍼지도록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래야 제대로 사는 겁니다.
물질이나 건강이나 자식 사랑이나 일… 이런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먼저입니다.
단지 소극적으로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그들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내실 것이다 하는 겁니다.
이 얘기는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다 하는 간증입니다.
지금 풀무불에 던져지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세 친구를 데리고 갔던 군사에게 불똥이 튀어서 그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내가 지금 그 불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타 죽어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겁니다.
우리 역시 그렇지요?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을 보면 이제는 접어야 되겠구나 그런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한 번 지나온 세월들을 돌아 보세요.
사람은 웬만한 나이가 들면 자신이 겪은 인생을 파노라마로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별로 오래 살지 않았더라도 그런 것은 나름대로 다 있는 법입니다.
누구 것이라도 파란만장하지 않은 게 없지요?
한 번 그 동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장면 하나 하나를 뜯어서 생각해 보세요.
영화는 장면들을 자르고 잇고 해서 편집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네 인생은 그게 불가능합니다.
장면마다 뜻이 있어서 어떤 모습으로든 갈무리 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지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 하나는 다 고비를 넘긴 셈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희로애락에 관계없이 모두 감사의 조건인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지금 살아 있습니다.
잘못되려면 벌써 잘못 되었고, 죽으려면 진작에 죽었을 거예요.
누가 하셨습니까?
내 능력으로, 내 인맥으로, 내 수단으로 했습니까?
아니지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우리를 눈동자 같이 바라보시는 그 불꽃 같은 사랑이 우리를 지금까지 지켜 주신 겁니다.
한 번 바로 왕 앞에 꿈 해석을 하러 나갔던 요셉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지요?
잘 하면 살 기회지만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일개 종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왕을 비롯해서 나라의 점쟁이들과 박사들, 그리고 온 백관들이 자기를 주시합니다.
분위기에 압도된 요셉에게 일순간 해일 같은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경각에 달린 자기 목숨을 보는 거예요.
잘못 되었을 때의 출구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때 그가 드렸을 기도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제가 죽게 되었다면 형들이 구덩이에 던졌을 때나,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렸을 때일 겁니다. 아니면 보디발의 집에서였을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지금까지 저를 살려 두셨어요. 그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제 생명을 돌리신다 해도 감사할 뿐입니다. 혹 바로의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있다면 그 또한 순종하겠습니다. 번민하는 바로를 평안케 하소서! 나를 도구 삼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어떻든지 당신은 의로우십니다!”
마음 속의 폭풍은 물러가고 호수처럼 고요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왕의 꿈 얘기를 듣습니다.
누가 하셨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이 다 하신 겁니다.
우리 삶 역시 모양만 다르다 뿐이지, 요셉이나 오늘 세 친구들과 똑같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우리 앞서 모든 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는 지금도 진행 중인 겁니다.
하나님은 세 친구들을 책임져 주신 것처럼 우리들의 삶 역시 책임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죽은 하나님! 성경에만 기록된 하나님!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머리 털 까지 세신 바 되시고, 우리의 전 생애를 프로그램 하셔서 빈틈없이 진행해 가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왕께서 우리를 풀무불에 던지시겠다구요? 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겁니다!”.
그 자신감 있는 신앙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들의 세 번째 신앙고백은 우리가 잘 아는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입니다.
믿음의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 다 거기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경지입니다.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풀무 불에 던져지더라도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지막 고백은 거기서 한 차원 더 올라갑니다.
혹 하나님이 자기들을 건져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목숨까지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처하고 있는 상황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지금 세상에 우상한테 절한다고 용광로 속에 우리를 던져 넣을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정말로 우리에게 이런 엄청난 일이 생긴다면, 어쩌면 우리 중엔 풀무 불에서 죽는 편을 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크고 장엄한 일은 명분이 있잖아요?
순교한다는 명분,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 받게 되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믿음이 더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이런 것을 생각해 보시지요.
하나님이 말씀으로 기록해 놓으셨을 때는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각 시대와 상황에 대한 메씨지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별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별로 명분이 없는 일에 우리를 쓰기 원하시는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생활 속의 조그만 순교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 봐야 별 대단한 칭찬 듣지 못하는 일들, 예를 들면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술자리를 거부한다든지, 사업하면서 이중장부 쓰지 않는다든지, 주일 성수 때문에 특근에 결석한다든지 하는, 그런 조그만 일부터 손해 보기 원하신다는 겁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런 것 말고 우리가 지금 상황에서 순교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데서 시작하는 겁니다.
당장 모든 것을 버려두고 아프리카로 건너가라고 하실까요?
다 때려치우고 당장 신학교 가기를 원하실까요?
일을 전폐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리에 나가서 소리 소리 지르면서 노방 전도 하라고 하실까요?
아니요, 그건 특별한 사명을 받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요?
주일 성수, 할 수 없는 겁니까?
십일조, 정말 할 수 없는 걸까요?
각종 소모임에 참석 하는 것, 정말 어려운 일일까요?
하루에 단 한 차례라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게 정말 할 수 없는 일일까요?
형제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것, 정말 어려운 일일까요?
정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 이 세 친구 같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부터 행하고 거기에 대한 간증과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작은 일부터 성실하게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그래서 그 고백의 규모와 수준이 점점 커져가는 일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후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합니다.
그리고 325년에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지요.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으면 좋았을 뻔 했는데 그렇질 못했습니다.
코스탄틴 대제가 죽고 그 뒤를 이은 황제가 리키니우스였는데 이 사람이 앞의 콘스탄틴 대제의 명령을 다 뒤집어 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자기와 제우스 신에게 절을 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때 로마에는 크리스천 장군들이 많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자기 부하들에게 그 명령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터어키 세베스타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한 군단에서 일이 벌어집니다.
이 아고라 클라우스 장군이란 사람은 골수 이방 교도로서 기독교인들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명령에 옳다구나 하고 자기 병사들에게 절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 군단에는 독실한 크리스천 병사가 40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이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장군은 그들을 꽁꽁 얼어붙은 호수가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각자의 얼음 구멍을 파게 하지요.
그런 다음, 명령하기를 옷을 다 벗고 그 얼음구멍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40명 병사 모두들 옷을 벗고 찬 얼음구멍으로 들어갑니다.
장군은 병사들 눈에 보이게 앞에 제우스 상과 로마 황제의 신상을 세워놓고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커다란 욕조를 만들어 놓고 밑에서 불을 떼도록 했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김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하면서 병사들에게 말하지요.
“지금이라도 여기 황제와 제우스 상에 절하는 사람들은 이 욕조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은 너희 몫이다. 살고 싶으면 나와서 절을 하든지, 아니면 거기서 얼어 죽어라” 그럽니다.
시간이 좀 흐르면서 병사 중 하나가 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구멍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제단에 절을 하고 욕조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병사는 금방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병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욕조 밑에서 불을 때고 있던 병사였는데, 이 모든 광경을 보는 중에 그는 잠시 환상을 봅니다.
얼음 구멍에 있는 병사들 모두가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휘황찬란한 광채 가운데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어 보니 모두 40명이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명은 죽어서 39명이 되어야 됐는데 다시 한 번 세어봐도 분명히 40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그들 40명을 하나 하나 봤는데 그 중에 자기 얼굴이 보이는 겁니다.
그때 그 병사가 ‘아! 한 사람이 나였구나!’ 깨닫습니다.
그리곤 불 때던 데서 나와서 장군에게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면서 빈 얼음 구멍에 제복을 벗고 들어갔습니다.
그들 40명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했습니다.
말씀 드렸듯이 이런 얘기가 지금의 상황과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우리 생애 가운데 실제로 이런 일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사업으로든 연주로든 이슬람권으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어찌 어찌 중국의 지하교회나 이방 신을 믿는 아마존으로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상치 못했던 일들을 실제 겪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료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은, 그런 일이 실제 있을 때 오늘 우리가 나눴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우선은 작은 일에 순교하는 게 순서겠지만, 그런 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큰 사명을 주실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그 다음 일을 미리 마음에 새기자는 겁니다.
인생은 어차피 하나님 영광을 위해 내가 죽어야 진짜 살고, 그래야 세상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이 세 친구들이 했던 신앙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믿음을 키워 가십시다.
“첫째,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건 없다! 둘째,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살아 계시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 “이것이 오늘 주인공인 세 청년들 뿐 아니라 저와 여러분 모두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친구는 결국 뜨거운 풀무불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머리털 하나 그슬린 것 없이 성한 몸으로 느부갓네살 앞에 섭니다.
왕도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세 사람이 했던 신앙고백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저를 따라 해 보실까요?
1.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다
2.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살아 계시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
이 신앙고백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영원한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넘어서,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에게 하늘의 평안과 생활의 필요와 사명을 감당할 재능 등,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 믿음 가지고 승리 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