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11

 

성경 창32:24~32

제목 열심만이 능사인가?

 

 

저는 TV 드라마를 열심히 보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푹 빠져서 보는 드라마는 일부러라도 몇 번은 봅니다.

사람들이 괜히 열심히 보는 것은 아닐 테고 뭔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런 드라마마다 공통점은 나름대로 다 메씨지가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내조의 여왕이란 드라마 중에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부사장인가 전무인가 하는 사람이 사장 자리를 차지하려고 온갖 술수를 다 부리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짐을 싸가지고 나가다가 부하 직원 몇 명을 만나지요.

다들 한때는 자기를 우상처럼 떠받들었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합니다.

다들 너무 열심히들 하지 말아. 끝까지 올라 와 보니까 별 것 아니야 그러지요.

또 좀 오래 됐는데 의사들의 세계를 다룬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제목이 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김명민이라는 배우를 거기서 아주 인상 깊게 봤습니다)

다른 의사는 손도 못 댈 수술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척척 해내는 유능한 의사였는데, 그도 결국 끝에 가서는 암으로 죽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명의라도 자기 병은 어떻게 못 해 보고 속수무책으로 죽는 겁니다.

선덕여왕이란 드라마도 몇 번 봤는데, 나름대로 뭔가가 있었습니다.

미실이란 여자가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온갖 재주를 다 부려서 남자들을 다스리고 힘을 써 보지만 결국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드라마들을 보면서 제가 느낀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열심히 하면 뭔가 되기는 하는데 그 끝이 너무 허무하다는 겁니다.

사장이 되고, 명의가 되고, 왕이 되기 위해서 거기 쏟아 붓는 열정과 정성은 정말 엄청납니다.

그런데 마음 먹은 대로 다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어느 순간엔가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는 겁니다.

즉 아무리 열심을 쏟아 붓더라도 인간의 열심엔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오늘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열심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은혜 가운데 말씀이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뭔가 한 가지를 잡으면 거기에 몰두해서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는 것을 우리는 씨름한다고 표현합니다.

성경에 그런 대표주자가 한 사람 나오는데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은 오늘 우리가 읽은 대로 얍복강까지 오는 동안 자기 전 생애를 씨름으로 일관한 사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습니다.

장자가 되려고 뱃속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지요?

그리고 장성해서는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어머니 뱃속에서 이루지 못했던 장자권을 기어이 따냅니다.

그리곤 외삼촌 집으로 도망갑니다.

거기서도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 동안 씨름합니다.

외삼촌 라반이란 사람도 보통이 아니어서 계속 야곱을 속입니다.

한 재산 줄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사람에게는 그걸 기대하기 어렵겠다 판단하지요.

해서 자기 재산을 모으기 위해 또 씨름합니다.  

외삼촌에게 양이나 염소 중에 얼룩이나 아롱진 것이나 점박이 새끼가 나오면 그것을 자기 소유로 달라고 하지요.

당시에는 그게 몇 마리 안 됐나 봐요.

그러니 그런 것들이 새끼를 낳아 봐야 얼마나 낳겠어요?

이런 생각으로 라반이 허락을 하는데, 왠걸 튼튼한 놈들은 전부 다 아롱이 점박이 얼룩이인 거예요.

어떻게 했는지 그 방법이 창30:36~39 까지 자세히 나와 있는데 수십 번을 읽어봐도 저로서는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뭔가 자기 나름대로 DNA를 조작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건데, 아무튼 한 가지 일을 20년 하니까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야곱은 평생 씨름합니다.

그런 야곱이니까, 그를 내내 지배해 온 좌우명이 뭐겠어요?

뭐든지 내가 씨름하면 된다 그거였을 겁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꽤 있습니다.

특별히 엘리트 코스를 밟고 온 사람들 중에 그런 생각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 믿는 믿음도 있지요.

그런데 자기 능력을 믿고 씨름하는 게 먼저지 믿음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즉 신앙이 있어 보이는데 가만히 보면 신앙이 아닌 거예요.

두 가지가 같이 가더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느끼는 한계가 뭡니까?

승승장구하다가 어느 순간엔 도저히 자기로서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는 겁니다.

지금 야곱이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씨름해서 안 된 일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거부가 돼서 금의환향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인다 그러니까 이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앞쪽 32:7을 보니까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노력하고 잔머리 굴리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엔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때가 온다는 겁니다.

두렵고 답답한 게 항상 있습니다.

이게 인본주의자들의 특징입니다.

다 되는 것 같은데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만약 내 힘이 다 소진되면 그때는 쓰러지는 일 밖에는 없잖아요.

그때가 돼서야 기도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이 꼭 그 모습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또 여전히 잔머리를 굴리지요?

자기 나름대로 씨름하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무리도 두 떼로 나누고, 야곱에게 선물을 보내는데 그것도 한꺼번에 안 보내고 나눠서 보냅니다.

조금씩 조금씩 형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다가 얍복강 가에 혼자 남은 게 오늘 본문입니다.

    

우선 여기서 알 수 있는 게 뭘까요?

그래도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비교적 우리와 비슷한 사람을 찾으라면 야곱 정도일 텐데, 그래서 우리가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이 야곱인데, 그를 통해서 우선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인간의 씨름을 통해서도 웬만한 열매는 거둘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야곱의 인생을 돌아 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고 노력했습니다.          

성취 욕구가 대단히 강한 사람이었어요.

아내를 얻기 위해, 한 밑천 잡기 위해, 일가를 이루기 위해 20년간을 불철주야 일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경쟁구도에 대해 한 번도 마다한 적이 없습니다.

상대가 형이든 외삼촌이든 같은 목동이든 간에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경쟁에서 이겼습니다.

지금 그의 이런 열심을 문제 삼자는 게 아닙니다.

경쟁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경쟁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다 느끼시겠지만 경쟁에는 독소가 있습니다.  

경쟁의 끝엔 반드시 ego ()가 있습니다.

내가 다 했다는 겁니다.

물론 처음엔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경쟁을 통해서 뭔가를 이룬 후에는 내가 했다는 생각에 빠지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뛴다는 것까지만 자극해 주고, 이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백할 수 있다면 경쟁만큼 유용한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했다라는 생각이 한 터럭만 있어도 그것은 이미 타락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야곱에게서 이런 쓴 뿌리를 뽑기 원하셨던 겁니다.

 

우리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곧 우리입니다.

우리의 속 마음은 야곱을 꼭 빼 닮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원하셨던 두 가지 태도는 우리에게도 정확하게 적용됩니다.

야곱의 인생을 전반기, 후반기로 나눈다면 아마 오늘 사건이 그 분수령이 될 겁니다.

물론 이 사건 후에도 야곱이 실수를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 바뀝니다.

여태까지의 실수는 자기가 의도한 바가 컸지만, 이 사건 이후로는 적어도 자기를 과신해서 스스로 씨름을 벌이지는 않습니다.

오늘 야곱에게 일어나는 변화 역시 야곱 스스로 벌이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처럼 어느 순간 우리 인생에도 찾아오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를 끌어왔던 관성을 깨고 새 틀에 우리를 집어넣기를 바라십니다.

오늘이 그런 날이 되시기를, 그래서 야곱처럼 이후의 삶은 지금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시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첫 번 째 이야기는 새삼스런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상황은 야곱이 엄청난 두려움 가운데 빠진 상황입니다.

20년이면 강산이 두 번 변하는 긴 세월인데도, 형 에서는 옛일을 잊지 않고 지금 복수하려고 자기에게 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먼저는 자기 형의 손에서 자기를 건져내 달라고 간절히 간구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끝내고는 자기의 처자들을 먼저 강 건너로 보냅니다.

그리고는 혼자 남아서 계속 기도하는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기도 제목이 바뀌는 겁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천사를 보내서 씨름하게 하지요?

그런데 그때 기도제목은 축복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자기나 자기 가족의 구원이 아니라 축복해 달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고 놔 주질 않는 겁니다.

 

우리도 기도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도 제목이 바뀔 때가 있지요?

그건 바로 성령께서 시키시는 겁니다.

오늘 성령께서는 야곱에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걸 아셨기 때문에 그의 기도를 바꾸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가장 먼저 간구해야 될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

이게 오늘 야곱과 우리가 가져야 될 첫 번째 마음가짐입니다.

여기서 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받으면 풍성해지고 부요해지는 그런 눈에 보이는 복만이 아닙니다.

오늘 야곱이 구했던 하나님의 복은 신약적으로 말하면 은혜입니다.

지금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이 씨름해서 얻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은혜, 그것을 지금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하셨던 일이 뭔지를 아실 겁니다.

1:27~28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랬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해서 땅과 하늘과 바다를 전부 다스리라 그러셨어요.

여기서 다스리라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열심히 뛰는 것, 경쟁하는 것, 헌신하는 것 등등 좋은 액션이 다 포함되어 있는 걸 겁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 이전에 뭐가 있다구요?

하나님의 복이 있다는 겁니다.

복 받으니까 다스리는 것이고, 복 받으니까 뛰는 것이고, 복 받으니까 헌신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잊지 말아야 될 것, 주객이 전도되면 안됩니다.

우리가 다스리고 경쟁하고 열심히 헌신하는 것 이전에 하나님의 복,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먼저라는 겁니다.

그거 안 받으면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야곱이 이제야 안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해결되지 않아요.

하나님의 복이 가장 먼저인 겁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전 생애를 거는 인생이 된 겁니다. 

물론 여태까지도 복을 구했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그가 구한 것은 당시의 문화권 속에서 있을 수 있는 장자의 계승권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뭔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니잖아요?

지금은 하나님이 주시는 직접적인 복, 그것 없으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 되는 그런 은혜!

그걸 지금 생명 다해 구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할 때, 열심히 뛸 수 있고, 열심히 재능을 계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일 필요한 것은 하나님! 제게 복 내려 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새로 번역된 성경의 아브라함 기사를 보니까,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랬습니다.

예전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랬는데 이제는 아예 네 자체가 복이다 그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자체가 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가 복덩이가 되어야 합니다.

복덩이 있는 곳엔 언제나 복이 퍼지겠지요?

우리가 복덩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데마다 거기에 복이 전염되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26장에 보면 이삭의 얘기가 나오는데 12절에 보니까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져서 그랬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씨름 해서 100배의 소출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복이 아니면 그건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류의 하나님 복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을 구해야 되고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겁니다.

바로 이 복에 대한 개념을 철저히 깨닫게 된 게 얍복강 가에서의 야곱의 태도였던 겁니다.

 

우리도 복 받아야 외국생활 잘 할 수 있습니다.

복 받아야 음악 잘 할 수 있고, 복 받아야 목회 잘 할 수 있고, 복 받아야 사업 잘 할 수 있고, 복 받아야 아이들 잘 키울 수 있습니다.

복이란 곧 은혜라 그랬지요?

그 은혜 없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아무 것도 못 합니다.

이걸 구하는 게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제가 축구를 좋아하는 건 다 아시지요? 

특히 챔피언스 리그는 빠지지 않고 봅니다.

그런데 그 챔피언스 리그의 98년도인가 99년도 결승전이 굉장히 유명합니다.

해마다 그 장면을 보여 주는데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과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맞붙습니다.

89분이 됐는데 뮌헨이 1:0으로 이기고 있었고 인저리 타임이 3분인가 4분인가 주어졌습니다.

시상대에서도 경기가 끝났다 생각하고 우승컵에 바이에른 뮌헨 이름을 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눈 깜짝할 새 맨체스터가 두 골을 넣어서 역전승을 거둡니다.

난리가 났지요.

한쪽에서는 좋아서 날뛰고 한쪽에서는 선수들이 자리에 퍼져서 엉엉 우는 겁니다.

그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영웅이 솔샤르라는 선수였습니다.

이 선수는 경기 내내 뛰는 선수가 아니라 후반전 끝에 나와서 10분이나 15분 정도 뛰는 선수입니다.

그러니까 팀이 꼭 한 골이 필요할 때 그 선수를 투입하는, 조커지요.

그런데 정말 그 솔샤르라는 선수는 꼭 필요할 때 골을 넣는 겁니다.

아주 정평이 나 있어요.  

이 선수가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은퇴했습니다.

한 번은 박지성 선수가 그 선수에게 어떻게 그렇게 골을 잘 넣냐고 물었답니다.

그 비결을 좀 가르쳐 달라 그랬대요.

그런데 그가 은퇴할 때가 돼서 그런지 그 비결을 가르쳐 주더라는 거예요.

첫 번째 비결은 골대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방향에서든 골대 쪽으로 차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골키퍼가 있든 없든, 수비수가 제 아무리 여러 명이 있든 상관없이 골대 쪽으로 차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번에도 보셨듯이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다른 수비수 맞고 골인되든지 하는 일도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공이 골대 쪽으로 안 가면 길이 없다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박지성 선수가 새겨 들었다는 겁니다.

두 번째 비결은, 보통 사람들은 공을 차는 줄 알지만 공은 갖다 맞추는 거라고, 터치하는 거라고 그러더랍니다.

즉 킥을 하는 게 아니라 터치만 해서 방향만 바꿔 주라는 얘기지요.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메씨 선수가 플레이 하는 것을 보셨지요?

절대로 세게 안 찹니다.

정말 공을 터치하는 게 어떤 거라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뭘까요?

우선은 하나님 쪽으로 차야 되는데 엉뚱한 쪽으로 차고, 또 내 힘과 능력으로 킥 하려고 합니다,

골대로도 아니고 터치하는 것도 아니니까 골이 안 터지는 겁니다. 

진짜 승리를 위해서 중요한 것은 볼을 골대 쪽으로 터치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게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방향만 살짝 바꿔주기만 해도 되는 일이 참 많이 있습니다.

오늘 야곱의 모습처럼, 여태 자기가 해 왔던 씨름을 버리고,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구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기도 속에 하나님!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주세요. 그거 아니면 전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 내용이 가장 깊고 간절하게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복과 은혜를 구하는 야곱의 변화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두 번째 메씨지는 야곱의 새 이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물러나지 않고 하나님과 씨름하니까 드디어 하나님이 항복하십니다.

져 주시지요?

그러면서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꿔 주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히브리 사람들이 세운 나라의 국호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뜻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다스리기를 원한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은 언젠가 제가 여러분과 말씀 중에 깊이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오늘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기를 원한다는 번역이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승부, 우리의 진정한 승리는 어디 있는 걸까요?

나를 내가 다스리는 게 아니라 나를 하나님이 다스려 주실 때가 아닙니까?

우리 교회, 우리 가정을 하나님이 다스려 주실 때 승리하는 교회, 승리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알면서도 그 다스림을 거부할 때가 많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늘 야곱의 문제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직접 다스리시기를 원하셨는데 야곱은 그것을 끝까지 거부하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진짜 복이 되고, 진짜 인생의 승자가 되는 길이 있는데 야곱은 계속 엉뚱한 것만 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는 비상 수단을 쓰신 겁니다.

직접 다스리시기 위해서, 진짜 야곱이 이스라엘 되게 하시려고 그 상황을 만드신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서 친히 저를 다스려 주세요 그 고백을 합니까?

힘이 있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힘이 있을 때는 언제나 우리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힘이 없으면 그 고백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야곱은 씨름 끝에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남자들은 다 아시겠지만, 남자들 하체의 힘은 남자 생식기 위쪽의 뼈- 고관절이라고 하지요- 거기서 나옵니다.

그 고관절이 하체 전체를 지탱하고 상체를 어느 만큼 받쳐 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곳이 고장 나면 남자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연아도 한때 이 곳에 이상이 생겨서 스케이팅을 관둘까 말까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그러더라구요.

이곳이 바로 환도뼈입니다.

이게 부러지면 달리기나 등산은 물론이고 어떤 운동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이곳을 쳐서 위골 시켰다 그러셨지요?

이제부터 야곱은 다리를 질질 끌고 다녀야 합니다.

1급 장애인이 된 겁니다.

한 마디로 힘의 근원이 되는 곳을 하나님이 쳐 버리신 겁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우리 힘의 근원이 되는 환도뼈가 다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일 수도 있겠고, 어떤 사람은 젊음일 수도 있겠고, 어떤 사람은 학벌이나 외모가 될 수도 있겠지요.

음악일수도 있고, 유창한 언어나, 기술이 또한 우리들의 환도뼈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게 다 하나님 안에서 박살 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걸 없이 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 힘의 근원 같은 것을 의지하지 말고, 먼저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다 맡기라는 겁니다.

오늘 사건에서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져 주셨지만, 실제 우리는 하나님께 항복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려 주십시오! 이 기도가 중요한데 그렇다면 이 다스려 달라 하는 것은 뭘까요?

간단합니다.

우리의 눈이 바뀌는 겁니다.

세상 일이라는 것은, 보는 것과 그 본 것을 해석하는 것, 이거 두 가지로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보는 것과 그 해석!

이것을 분별력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 주시면 우리에게는 바로 이 분별력이 생깁니다.

따라서 같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다스려 주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분별력에서 가장 많이 차이가 납니다.

오늘 여기에 대해 우리 예수님이 이것을 통틀어 설명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12: 5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한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어떤 징조가 오면 그 결과를 잘 압니다.

지중해 쪽에서 구름이 몰려 오면 이건 분명히 비 옵니다.

또 남쪽 사막 쪽이니까 에서 바람이 불면 곧 더위가 온다는 건 잘 압니다.

그런데 해석이란 건 그렇게 징조를 맞추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걸 통해서 다른 징조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야 그게 해석이고 그 양자를 다 아는 게 분별력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죽었다가 깨나도 모릅니다.

 

지난 5월에 아이슬란드 화산이 폭발했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지체들 가운데도 직 간접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 피해가 어땠는지 우리가 잘 알지요?

5일 동안 유럽을 운항하는 비행기 6 3천대가 올 스톱이 됐고, 그 피해액은 무려 11 5천만 유로 정도 됐다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 약 1조 천억쯤 되지요?)

정말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모를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해석은 뭐냐?

 

인간이 그렇게 잘 만들어 놓은 비행기도 화산재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과학의 꽃이라고 인간이 자랑하는 그 대단한 발명품도 하나님이 손 가락 한 번 까닥하면 무용지물이 되는구나 하고 깨닫는 게 해석입니다.

인간 앞에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

그 메씨지를 아는 게 해석하는 겁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바로 이런 해석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보는 것은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게 해석입니다.

 

성경에서 이 해석과 가장 비슷한 말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곧 해석입니다.

그래서 고후 5:7 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

보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바로 이게 하나님의 분별력을 갖고 사는 사람의 삶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이 야곱에게, 우리에게 바라시는 자세는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겁니다.

믿음있는 사람은 현장에 나가서 겉으로 보이는 것만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연약하구나 부족하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뭐든 가능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뿌리를 볼 줄 알고 배후를 볼 줄 아는 것,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데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게 바로 해석이고 믿음이고 분별력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입니다.

우리에겐 그 눈이 있는 겁니다.

 

오늘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부러뜨리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야곱은 정말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우리가 자랑해오고 자부심 가져왔던 것에 대해서 스스로 위골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주님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빙산의 일각만 보는 게 아니라 수면 아래 있는 보이지 않은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믿음 있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자기의 열심만으로 뭐든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연약한 존재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은혜 주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끝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다.

또한 온전히 주님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거기서 그때 그때의 주님의 메씨지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씨름이나 본인의 열심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와 다스림으로 승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