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람: 모두 / 글쓰기: 관리그룹 / 댓글: 정회원 이상
성경 롬1:13~15
제목 길 막힌 것의 유익
제가 목사가 되기까지는 한 가지 사건이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전에도 이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내용을 아시는 분들은 다른 분들을 위해 한 번 더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새 잊으셨다면 감사하구요)
제가 84년도에 결혼을 해서 88년에 어떤 미국회사를 들어갔습니다.
그 동안 결혼 4년 동안에도 이런저런 고생을 많이 해서 그 회사에 들어가고 나니까, "아! 이젠 고생 끝이구나" 그랬지요.
그런데 그 회사를 한 6개월 쯤 다녔을 때, 회사에 노사분규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이슈가 도저히 해결될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일년을 끌다가 결국은 회사도 엉망이 되고, 사원들도 다들 그만두어야만 했습니다.
정말 평생 근무할 직장으로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되고 보니 너무나 아쉽더라구요.
그런데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모시고 있던 상사가 그 업계의 실력자였는데, 그 분이 신설회사의 회사설립준비위원장으로 가게 됐어요.
해서 자기가 데리고 있던 사람들 중에 세 명을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세 사람 중에 저도 포함되었지요.
그 회사는 중앙일간지에 보도될 만큼 크고 전망이 좋은 회사였습니다.
그 분이 이제 모든 실권을 쥐고, 스카웃을 하고, 업무를 분담시키고, 사원을 배치시키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형식적으로 입사시험과 면접을 보고 이제는 회사에 나오라는 말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두 사람은 합격이 되고 저만 떨어졌습니다.
당시 본사가 부산에 있었는데, 한 걸음에 부산으로 달려가서 어떻게 된 거냐고 우리 상사였던 분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분 말씀이 우리 세 사람 다 노사분규가 있었던 회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신임사장이 거절을 했다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런데 제 동료 두 사람은 연고지가 부산이라서 구제를 해 줄 수 있었지만 저는 안됐노라고, 미안하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기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혼자 따졌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꼭 될 듯 될 듯 하다가 안 되게 하십니까? 누구를 약 올리시는 겁니까?
도대체 들어가는 회사마다 이렇게 만드시는 이유가 뭡니까? 결국 그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사실, 저는 고등학생 때 주의 종이 되겠노라고 서원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커 갈수록 그 길은 제 길이 아닌 것 같아 피해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나와의 약속을 지켜라"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인생의 고비 때마다 그 문제가 저를 걸고 넘어뜨렸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있다는 건, 결국 자기의 사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결국 그 일이 있고 나서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그 회사에 들어갔다면 저는 어쩌면 목사가 안 됐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그 회사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사실은 그 회사에 다녔어도 몇 년 후에 또 문제가 생길 뻔 했습니다. 회사의 경영이 부실했는지 다른 동종업체에 합병되고 말았습니다)
가끔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 분께 다 맡기고 살면 우리는 모든 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 생각과는 달리 길이 막히는 겁니다.
분명히 말씀대로 순종하고 나가는데도 일이 안 풀리고 막히는 겁니다.
난관과 장애물이 계속 나타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럴 수 있을까요?
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허락하실까요?
대답은 ‘과정 가운데 꼭 필요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들의 앞길이 ‘무조건 시온의 대로가 활짝 펼쳐져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지요?
“여러 번 가고자 했다, 다른 이방인 중에서처럼 열매 맺기를 원했다, 그런데 길이 막혔다” 그럽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가 바로 그겁니다.
왜 하나님을 내 구주, 내 아버지로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길이 막힐 때가 있냐는 겁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하는 사람의 길을 막으시는 이유는 뭘까요?
말씀 드린 대로 우리가 가는 과정에 필요해서지만, 이 시간에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말씀 가운데, 때때로 우리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다시 일어나 당당히 인생길을 헤쳐 나갈 용기와 새 힘을 얻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들에게 때때로 길이 막히고 그 길이 험난한 이유가 뭘까요?
두 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은데, 첫째는 환경의 인도가 아니라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지만 말씀에서 오는 위로와 확신이 왔을 때의 그 뜨거움보다는 환경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더 크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즉 길이 열리면 다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길이 열리면 그게 다 하나님 뜻일까요?
물론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좋은 환경을 베푸시고 우리 일이 탄탄대로가 되게 하시지요.
해서 그렇게 환경을 통해서 오는 확신을 다른 무엇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환경에서 오는 확신보다 말씀의 인도가 더 필요합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좋아진 환경을 통해서 “옳지! 됐구나 하나님 뜻이야” 그렇게 확신하면 안되고 다만 하나님께 감사 드릴 일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슨 행사를 하나 계획했다고 합시다.
좋은 날씨가 보장되어야 치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좋은 날인 거예요.
그렇게 좋은 날씨를 보면서 ‘옳지! 하나님 뜻이구나’ 확신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날씨가 안 좋으면 그 확신이 무너져야 되나요?
비가 오고 천둥 번개 치면 그게 나쁜 날씨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는 겁니다.
환경의 인도가 아니라 말씀의 인도를 받을 때 흔들림이 없는 것이지, “나는 매사에 환경의 인도만 받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 사람의 인생은 들쭉날쭉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만약 환경의 인도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그러면 마귀는 할 일이 없습니다.
마귀가 할 일은 그냥 환경만 막으면 되는 거예요.
예수 믿으려고 하는데 부모님이 막아요.
그러면 안 가면 되지요?
환경이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그러면 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교회 가라 그럴 때까지 안 가면 어떻게 구원을 얻겠습니까?
환경은 가로막힘이 있지만 말씀의 인도하심은 뭐예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그렇게 환경을 뛰어 넘어서 말씀이 나를 이끌고 가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환경 좋으면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환경 때문에 확신 갖지 마시라구요.
그것보단 언제나 환경을 뛰어넘는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시는 것처럼 사도 바울조차도 길이 막힐 때가 있는데, 왜 우리의 길이 안 막히겠습니까?
그러나 길이 막혀도 말씀이 인도한다 그러면 가야겠지요?
요나를 생각해 보시지요.
환경이 그를 완벽하게 지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의 길로 갔습니다.
욘1:3에 보니까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 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이 아니라 다른 데로 가려고 하는데 마침 배가 있었어요.
딱 맞아 떨어졌지요?
그렇다면 그 딱 맞아 떨어지는 환경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요?
그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불순종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뭡니까?
길이 열린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길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환경의 인도를 받는 게 아니라 주님의 뜻을 알라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 다 환경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지요?
믿음이 연약할 때입니다.
우리 믿음이 어린 아이 같을 때 주님은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해서 좋은 환경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어린 아이로 남아 있을 수는 없잖아요?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어요.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는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니라” (히5:13~14)
무슨 말씀입니까?
왜 장성한 분량의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어린 아이는 젖을 먹는 자래요.
즉 근본적으로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어른의 특징은 젖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지각을 사용함으로 – 즉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아- 선악을 분별한다는 겁니다.
환경이 나빠도 말씀 따라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는 수준, 그게 장성한 믿음을 가진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뭐냐?
젖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의의 말씀으로 성숙한 하나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버텨야 합니다.
‘믿음’을 헬라어로 ‘에무나’라고 하는데, - 그래서 로마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즉 믿음이란 ‘버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길이 막히고, 상황이 나쁘더라도 버티는 게 ‘에무나’, 믿음이란 겁니다.
그런데 환경의 인도를 받는다 그러면 견딤으로 살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환경이 내 상황과 다르기 때문에 버텨야 되는 게 바로 믿음인 거고, 그래야 거기서 진짜 하나님의 크고 깊고 넓고 결국엔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환경만 바라봤다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수 있었겠어요?
반대로 환경 좋은 소돔 땅을 얻은 롯의 인생이 잘 풀린 건가요?
만약에 환경이 좋아서 성공한 사람의 사례나 환경이 나빠서 실패한 사람들이 사례를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찾기 어려울 걸요?
반대로 나쁜 환경이 아니라 말씀에 의지해서 자기 길을 간 사람들 얘기를 성경에서 생략한다면, 아마 우리가 아는 위대한 성경 인물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환경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환경이란 거기에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믿음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바로 그 모습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이고, 우리 가진 진짜 힘입니다.
이렇게 삶의 모든 부분에서 말씀만 따라가고 말씀에 의해서만 지배 받는 거룩한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오히려 길이 막힐 때 생각지 못한 유익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길을 막으시는 거예요.
길이 막히면 우선 드는 첫 번째 느낌은 원망스럽지요.
도와주셔도 될까 말까 한 판에 막으시다니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길이 막힐 때 거기서 오는 유익이 반드시 있습니다.
서두에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회사원이 되었다면, 이렇게 귀한 하나님 사역을 할 수 있었겠어요?
그리고 여러분을 만날 수 있었겠어요?
더욱이 이렇게 아름다운 비엔나에 살 수 있었겠어요?
더 다행스러운 건, 제 성향으로 봤을 때 회사원으로 살게 됐다면 저는 아마 믿음을 떠났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길을 막으신 것은 정말 복이고 유익이지 훼방하신 게 천번 만번 아닙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경우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왜 하나님은 바울이 그렇게 여러 번 로마로 가려고 애썼는데도 막으셨을까요?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뭔가 깊고 영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부분은 아둔한 우리 생각으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문제일 겁니다.
해서 우리 입장에서, 성경 외적인 입장에서 한 번 생각의 나래로 상상하고 추론해 보자구요.
왜 하나님은 바울의 로마 행을 막으셨을까요?
바울로 하여금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입장으로 볼 때, 바울의 로마 행이 막힌 것의 가장 큰 유익은 바로 이 로마서 기록입니다.
로마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성경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바울을 안 막으셨다면 이 귀중한 성경이 써졌겠어요?
가서 만나서 얘기하고 설교하면 되지 뭐하러 글을 쓰겠습니까?
“바울이 로마 성도들을 만나 설교하고, 예배 드리고, 교회를 세우니, 모든 성도들이 은혜 받았더라 끝.” 그러면 되는 겁니다.
세세히 기록할 아무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막으셨어요.
바울은 로마에 너무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서 갈 수가 없었어요.
시간은 많고, 가고 싶기는 하고…
결국 편지로 남길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 내용이 뭡니까?
복음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입니다.
복음이 뭔지 처음부터 끝까지 잘 정리한 겁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로마로 가서 사람들을 만났다면 도저히 안됐을 기록을 써서 로마에 보낸 거예요.
신앙의 도리가 뭔지, 복음의 핵심이 뭔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부분들을 모아서 집대성한 겁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여러분은 로마서를 가장 사랑하게 될 겁니다.
로마서는 한 마디로 성경의 알맹이고 고갱이고 다이아몬드입니다.
월드컵대회가 끝나니까 축구 선수들의 인기가 올라가고 그들을 둘러싼 얘기가 엄청난 속도로 번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이지요.
미혼 여성들은 전부 다
그들의 그런 힘이 다 어디서 나왔겠어요?
축구에서 나왔습니다.
축구를 잘 하니까, 자기 분야에 탁월하니까 인기를 끌고 선망의 대상이 된 겁니다.
로마서가 바로 그런 책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 그 전체의 뿌리가 되고 기반이 되어주는 교리와 주님의 생각이 이 로마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읽으면 저절로 힘이 납니다.
여러분도 로마서 8장의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 말씀을 좋아하시지요?
그리고 정말 내가 누군지, 그리고 어떤 존재인지 발견하려면 로마서 1장을 읽어 보시면 됩니다.
또 그런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1장부터 7장까지를 쭉 읽어보시면 바로 나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둘러싸고 엄청난 책들이 나왔습니다.
로마서가 없었다면 칼 바르트의 최고 역작이라고 하는 로마서 주석도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고,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그 유명한 로마서 강해설교도 없었을 겁니다.
만약 성경 65권이 다 없어지더라도 로마서만 있으면 기독교는 살아 남을 거다 그렇게 말한 학자도 있었습니다.
논문처럼 어렵고 난해하긴 하지만 로마서는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 귀중한 성경은 어떤 한 사람의 길이 막혀서 써지고 인류의 가장 귀한 유산이 된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때때로 여러분의 길이 막혔다고 낙심하고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난관이 유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는 우리 속담도 있듯이, 사실 우리의 창의력은 막힐 때 나오는 것입니다.
독창성 역시 다른 사람이 이미 다 시도해 본 거라 뭐 해 볼 것 없을 때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닙니까?
중국 한 무제 때 사마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좋은 관리가 되기를 원했는데 어떤 일로 왕의 미움을 삽니다.
당장 사형에 처해져야 했지만, 그 재능을 아까워한 왕에 의해서 죽지는 않고 남자로서는 가장 수치스러운 궁형(宮刑) – 남자의 상징을 거세 당하는 형벌 – 을 당하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관리나 정치가로서의 길은 막히지만 대신 그는 초야에 묻혀서 중국 역사서 중의 가장 위대한 기록인 ‘사기’를 쓰게 됩니다.
정상적인 출세 가도를 달렸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류역사를 보면 길이 막혀서 남겨진 탁월한 기록이나 발명이나 아이디어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길이 안 막혔다면 도저히 나오지 않을 소산들이 세상엔 엄청나게 많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철저히 준비해야 됩니다.
그러나 너무 거기에 매이면 안됩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믿는 이들은 그 상황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달리 보면, 길이 막힌다는 것은 자기가 준비한 것으로는 안 되고 준비한 게 다 쓸모 없어졌다는 얘깁니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치명적인 것 같지만 조금만 더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오히려 유익입니다.
막히니까 내가 준비한 학벌, 내가 준비한 재능, 내가 준비한 은사, 내가 준비한 계획. 이런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 뜻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닙니까?
만약에 어떤 막힘도 없이 우리가 준비한 것으로 다 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아시고 때때로 길을 막아 주시는 겁니다.
그럴 때 보여 주시는 새로운 길이 뭐지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나만이 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겁니다.
해서 길이 막혀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가야 합니다.
결코 낙담하고 실망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나는 두 자매가 있습니다.
유학생활이란 것은 시작도 어렵지만 끝나고 나서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한 자매가 있었는데, 아주 좋은 실력으로 국립음대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일년쯤 됐나요?
자기 지도 교수와 잘 안 맞았나 봅니다.
무척 힘들어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요, 정말 자기를 지도하는 선생님과 맞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결국 이곳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매한테 아쉬운 게 그겁니다.
자기 입맛에 맛는 게 어디 있겠어요?
조금 더 버텨보지, 그래서 하나님이 새 길을 열어 주실 때까지 좀 기다려 보지… 그러면 길이 열릴 텐데… 그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곳을 떠난 게 꽤 오래됐는데 무척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또 한 자매는 졸업을 하고도 진로를 못 정해서 하루 하루 속을 태우면서 살았던 자매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끝까지 버티더라구요.
오해도 사고 욕도 먹으면서 이곳에서 악착같이 버티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이 어떤 계기를 주시고 그것을 발판으로 지금은 나름대로 자기의 음악세계를 펼쳐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고 보면, 길이 막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길이 막히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길이 열린다고 해서 그게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요나의 경우에서와 같이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늘 찬양하는 대로 부르신 곳에서 찬양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길을 막으십니다.
환경을 나쁘게 하십니다.
하지만 뜻 없이 괜히 막으시는 게 아닙니다.
환경보다는 말씀에 인도함을 받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겁니다.
당장은 말씀이 눈에 보이지 않겠지만, 욥이 고백한 대로 언젠가는 귀로 듣기만 했던 말씀이 눈으로 보이는 때가 올 겁니다.
그때까지 어떻든 말씀의 인도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은 그 자체에 힘이 있어서 읽고 듣고 입으로 시인하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믿고 나아가십시오!
또, 길이 막히는 것은 거기에 유익이 있어서입니다.
도로에서는 막히는 게 적신호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막히는 게 청신호입니다.
뭔가 독창적인 것을 주시려는 주님의 뜻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뚜기처럼 여러분의 심중 밑바닥에 묵직한 것을 넣어 채우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믿어왔던 스팩들을 의지하지 말고 말씀과 기도와 묵상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열악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 때문에 보석처럼 빛나는 뭔가가 우리에게도 생겨날 것입니다.
그날을 즐거움으로 기대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