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람: 모두 / 글쓰기: 관리그룹 / 댓글: 정회원 이상
성경 히11:1~6 제목 불확실하기에 오히려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 아래엔 부목사와 전도사를 합해 수십 명의 부교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원칙 중 한 가지는 연말이 되면 그들 중 몇 명을 꼭 자른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다들 이번엔 내 차례인가 하고 긴장 한다는 겁니다. 물론 잘리는 입장에서는 다만 한 달 전에라도 통보를 받았으면 좋겠는데, 이 목사님은 늘 12월 마지막 주에 그 여부를 알려 주는 겁니다. 유임이 확정되면 휴~ 하고 한숨을 내 쉬는 것이고, 잘리면 그 부교역자는 무조건 일년을 놀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주가 새해인데 보통 교회는 이미 연말에 교역자들의 인사 이동이 다 끝납니다. 해임당한 입장에서는 알아볼 데 조차 없는 것이지요. 평소에도 그 목사님은 회의를 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여러분 중에 몇 명은 연말에 반드시 잘린다” 엄포를 놨었고, 매년 그 말을 성실하게 지켜왔답니다. 그래도 제게 이 얘기를 해 주었던 친구는 지방으로 가야 되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자진 사퇴를 했기 때문에 그 악습의 피해자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럽니다. 생각해 보면 참 고약한 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상한 것은 교인들은 그 목사님을 더 없이 존경하고, 또 교회는 점점 부흥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니까 그 교회 출신 부교역자들이 대부분 잘 풀리고, 또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 교회에서 훈련 받았던 게 가장 오래 남더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를 나온 후에는 더 이상 그런 긴장과 열심을 체험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해서 결국 다들 그 목사님의 의도가 나쁜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비밀은 그 목사님이 강사로 나왔던 어떤 교역자 수련회에서 밝혀졌습니다. 그 목사님 얘기가 이랬답니다. 사람은 불안정할 때 더 열심히 일하고 더 기도하기 때문에 자기는 그것을 담보로 부교역자들을 독려한다는 겁니다. 물론 별로 아름답지 않은 방법이지만, 그게 본인들에겐 약이 되면 됐지 독이 되지는 않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연말이 되면 자기가 자르지 않더라도 수십 명의 부교역자 중에 몇 명은 으레 일신 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하더랍니다. 그런 부교역자들에겐 따뜻하게 격려해 주고 본인이 놀랄 만큼의 퇴직금을 줬답니다. 그리곤 한 가지 부탁을 했는데, 앞으로 얼마간만 같이 있던 부교역자들과 연락을 하지 말아 달라 그랬답니다. 좀 의아해 했지만 워낙 퇴직금을 많이 받은 터라 다들 그러마고 약속하고 그것을 지켰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그 목사님이 하신 일은, 떠난 사람에 대해서는 당분간 그 어떤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교역자들에겐 나름대로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것이지요. 어떤 면에서는 씁쓸한 구석도 없잖아 있지만 그 목사님의 진심을 알면 나름대로 지혜롭게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불확실성에 관한 얘깁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확실한 것을 좋아하지, 불확실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도 확실한 쪽을 선택하고 그 길로 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확실치 않은 쪽으로 인도하실 때가 많습니다. 아니 우리 인생의 대부분을 불확실한 쪽으로만 인도하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못 믿고 못 의지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애매모호한 곳으로, 앞이 잘 안 보이는 흐릿한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왜 그러실까요? 왜 안전과 확실함이 담보되지 않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쪽으로 이끌어 가실까요? 그 긴장을 통해서 얻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는 양분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되는 까닭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도 말씀 중에 성령의 조명이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확실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를 얻게 하시기 위해서인데, 첫째는 믿음이고 둘째는 겸손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과 겸손, 이 두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의 토양에서는 결코 자라나지 않습니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해야만 자라납니다.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이나 유랑했던 광야입니다. 광야라는 곳은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인 불확실성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알고 보면 광야 생활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들을 그 광야로 몰아 넣으십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로 믿음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겸손케 하시려는 의도입니다. 하나 하나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모든 게 확실하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슨 믿음이 필요할까요? 눈에 빤히 보이는데 믿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냐 그거지요. 그런데 보이지 않으니까 믿음으로 반응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은 잘 아시는 대로 ‘믿음장’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습니다. 불확실성 가운데 믿음으로 반응했던 신앙의 선조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고 있지요? 그래 놓고 결론 내리기를 – 뒤쪽이 아니라 앞쪽에 미리 결론을 내려 놓고 있는데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 분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또 상 주시는 이심을 알게 될 거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조건이 되는 상황이 뭐냐? 바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히 11장에 열거되어 있는 믿음의 조상들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다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떠난 사람들이고, 그렇게 믿음으로 반응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좋아하시고 그들에게 친밀감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안정적이고 확실한 갈대아 우르를 버리고 불확실한 곳으로 부름을 받지요. 어디로 가는 지나 알면 불안감이 덜할 텐데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정확하게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움직인 것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불확실성이 선물한 게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친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순간순간 물으십니다. “너 확실한 곳에서 나 없이 살래, 아니면 불확실하지만 나와 친해 지면서 믿음으로 살래?” 저와 여러분의 결정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불확실하지만 하나님 믿고 의지하는 그 길을 가야 될 줄 믿습니다. 어떤 여자에게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가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 고민을 알고 있던 친구가 제안을 합니다. “내가 한 번 네 약혼자에게 접근해서 유혹해 볼까? 만약 거기에 넘어오면 가짜고 안 넘어오면 진짜 아니겠어?” 꺼림직했지만 평생 함께 할 사람인데 한 번쯤 그런 테스트를 하는 건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냐? 남자는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테스트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자는 자기에게 믿음이 없는 그런 여자와는 평생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파혼했습니다. 또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친구의 여자 친구에 대해서 둘 간에 이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너 네 여자 친구 믿냐?” “그럼! 믿지.” “어떻게 믿냐? 양다리 걸치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너한테 말한 게 다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 ‘무슨 소리야 나는 그녀를 믿어’ 이렇게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좀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야! 나 용산에서 근무해. 네 여자 친구한테 카메라를 설치해 줄까? 5만원이면 24시간 감시가 가능해” 그 친구가 솔깃해서 “그래 줄래!” 그럽니다. 둘 다 꾸며낸 이야기지만 만약 이게 실제 상황이라면 그게 사랑일까요?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고 존중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는 겁니다. 감시하고 테스트하는 게 무슨 믿음입니까? 요즘은 부모들이 유아원에 있는 자기 아이를 집에서 컴퓨터로 볼 수 있답니다.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아이가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금방 유아원에 전화를 넣는 겁니다. 좋은 시스템같지요? 그리고 그 유아원은 그런 시스템에 대해서 “안심하고 맡기세요!” 광고하고 자랑한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런 유아원에 여러분의 자녀를 맡기시겠어요? 아이들을 기계 취급하면서 인격적인 신뢰가 바탕 되지 않은 곳에 어떻게 아이를 맡깁니까? 그런 믿지 못하는 관계 속에서는 절대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요! 믿음이란 반드시 상처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 믿음인 거예요. 제가 살아오면서 연애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을 종종 봐 왔습니다. 혼기가 꽉 찼는데도 사람을 만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가끔씩 누군가의 소개로 사람을 만나도 한 두 번 만나고 끝이지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부모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모의 이혼이나 별거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연애 안 하는 이유는 자명해지지요? 또 상처 받으면 어떻게 하나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아예 교제 자체를 포기하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이란 뭔지 아세요? 진짜 믿음은 상처 입어도 된다 하고 그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제를 하다가 상처 받을 수도 있지” 그것을 감수하는 겁니다. 그래요! 인생은 다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을 받아들이는 게 믿음입니다. 바로 그럴 때 능력도 생기는 겁니다. 가장 상처받기 쉬운 상황에서 믿어 주는 것, 그럴 때 가장 큰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 대부분의 장수들이 압살롬쪽으로 돌아섭니다. 그런데 아비새만큼은 다윗을 따릅니다. 힘의 균형이 압살롬에게 옮겨진 마당에 다윗으로서는 언제 자기 심복들이 자기를 죽이고 떠날 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 장군을 끝까지 믿어 줍니다. 아비새는 가장 쉽게 다윗을 죽이고 배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그를 믿어주었을 때 다윗에 대한 그의 충성은 가장 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상처 입을 상황이란 또한 믿음이 가장 크게 자랄 상황인 겁니다. 그리고 그럴 때 가장 친밀해 지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믿음도 위기 상황에 노출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못할 때가 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믿고 의지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가장 친한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의 성장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의 현실이 고달프고 어렵습니까? 앞길이 안개 낀 듯 뿌옇습니까? 고난의 바람이 불고 시련의 역풍이 휘몰아칩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내 믿음이 부쩍 자랄 때입니다. 이럴 때야말로 “나는 믿음으로 반응하겠습니다” 선언해야 합니다. 내 상황이 정말 어렵고 인간 관계도 믿기 어렵지만 그래도 믿어주겠다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랑이 싹트고 믿음도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 나라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춘향전의 스토리도 그겁니다. 결혼을 약속한 이 도령은 오지도 않고 연락도 안 합니다. 변사또는 그걸 알고 끊임없이 수청 들라 합니다. 상처받을 위험이 너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향이 춘향인 이유는,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겁니다. 비록 죽을지라도 이 몽룡에 대한 정절을 지키겠다는 거예요. 불확실하지만 그 모든 위험을 끌어 안고 이 도령의 대한 믿음을 죽음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춘향의 사랑은 위대하다고 칭송 받는 겁니다, 가장 어려울 때 가장 크게 믿음이 자랄 수 있다는 교훈 아닙니까? 그러므로 불확실한 상황에서, 상처 입을 상황을 감수한다는 건 사실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친밀감을 느끼십니다. 그렇게 믿음이 중요합니다. 사실 믿음이란 건 신앙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라 삶의 모든 면에서 다 필요합니다. 사업도 사실은 재정의 규모가 아니라 믿음의 규모대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집니다. 되는 CEO들은 부하 직원에게 믿고 맡겨 버립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면 혼자 다 하게 되어 있어요. 믿고 맡길 때, 그 사업체에는 그 CEO와 똑 같은 분신이 여럿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온통 다 맡겨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 수준에서 사역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또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렇게 생각하십시다! 우리 주변에 있는 불확실한 상황을 즐기십시오! 그러면 그 불확실한 상황은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을 줄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 사람 양쪽 다에게 친밀감을 줄 것입니다. 믿는 게 능력입니다. 믿음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보이고, 하나님께 우리 일생전체를 믿고 맡기는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불확실한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우리를 겸손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확실치 않으니까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를 콘트롤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잘 안됩니다 그때 깨닫는 게 뭡니까? “아! 나는 하나님이 아니구나! 나는 하나님의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하구나” 그러면서 우리의 인격이 다듬어집니다. 겸손해 지는 거지요. 가끔 보면 이런 불확실 속에서도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이 종종 나타납니다. 흔히 말하는 ‘직통 계시파’입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어” 그러면서 자신 있게 말하지요. 어떤 경우엔 목사인 저를 앞에 두고도 그런 얘길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속으로 그럽니다. “나한테도 안 하시는데 왜 당신한테만 말씀하실까?” 이런 문제를 두고 수잔 안소니라는 분이 말하기를, 자기는 그런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런 말을 단정적으로 하는 사람을 보니까, 하나님 뜻이 자기 요구와 일치하더라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 뜻이 번번히 자기 욕구와 일치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잖아요. 그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 자매들 잘 들으세요. 여기는 그런 경우가 별로 없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혹 여러분이 이런 직통 계시파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신학을 공부하는 전도사들이 그런 얘기를 자주 하는데, 마음에 드는 자매가 나타나면 “어제 밤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자매와 결혼하라 그랬습니다” 그럽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한테 속지 마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과묵하신 분인데 신학생 장가가는 문제까지 간섭하시겠어요? 그런데 또 순진한 자매들은 거기에 넘어갑니다. 그런 제안을 받으면 자매들도 기도하면서 하나님한테 “걔랑 결혼하면 절대 안돼!” 하는 말씀을 꼭 들으세요. 정말 저도 제 신학교 동기한테 그런 얘길 들었습니다. 눈치를 보니까 처가 식구들하고 어디를 가야 되는데 큰 차가 필요한 겁니다. 저한테 오더니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존대를 했는데, “어제 밤 하나님이 저한테 나타나셔서 전도사님 교회의 봉고 차를 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단칼에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거절하려고 했는데 순간 갑자기 어떤 생각이 지나가더라구요. 한 번 나도 골탕을 먹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순간 아주 친절하게 받아 넘겼지요. “아유! 그러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시니까 빌려 드려야지요. 그러면 제가 내일 차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주 좋아하면서 가더라구요. 다음 날 제가 그 친구를 만나서 뭐라 그랬을까요? “어제 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나님이 제게 나타나셔서 차를 빌려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 얼굴이 금방 빨개지면서 “누굴 놀립니까?” 그러면서 자기 자리로 가더라구요. 아니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가볍게 나타나셔서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세요. 한 번 욥을 생각해 보시지요. 욥이 우리보다 잘 믿으면 잘 믿었지 우리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의 고백은 뭐였습니까? 욥30:20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러잖아요? 대답도 안 하시고 돌아보지도 않으시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욥이 배운 게 뭐였습니까? 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구도자구나 깨닫습니다. 우리는 1년, 2년 후의 일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확실하지요? 오늘은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렇게 오늘 할 일을 확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고, 내일 할 일을 체크하는 게 우리 일이지 하나님이 뭘 다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콘트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순간순간 걸어가는 겁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등불과 같다 그랬습니다. 등불은 겨우 2~3 m 앞을 비출 뿐입니다. 서치라이트를 쏴서 몇 km 앞까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 방법이 아닙니다. 걷다 보면 그 다음, 그 다음을 조금씩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배우는 게 뭡니까? 바로 겸손입니다. 불확실하니까 겸손할 수 밖에 없고 그 모습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지방 선거를 봐도 그렇고 다른 일도 보면 공통적인 모습이 나타나는데, 교만한 세력과 겸손한 세력이 부딪치면 언제나 겸손한 세력이 이기는 것을 봅니다. 결국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라는 말씀은 언제나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더라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한 번 돌아보십시다. 그 동안의 과정 중에서 혹 겸손하지 못한 적이 있진 않았나요? 상황이 불확실 할수록 의지할 것은 주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실 겸손하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2/3는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불안정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수록 더 겸손해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확실성 속에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좀 확실한 길로 인도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런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깊은 안개 속으로만 인도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불확실한 모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해야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됐다 싶으면 똬리 틀고 있는 교만이란 놈이 튀어 나와 일을 그르치기 때문에 불확실 속에 두시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불확실성에 거하고 거기에 익숙해지고, 나아가서 그것을 즐길 수 있기까지 참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불확실하기에 오히려 성장할 수 있음을 알고 감사드립시다 믿음으로 기쁨을 드리고, 겸손으로 풍성한 삶을 엮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한 달 동안 여러분과 헤어지게 됐습니다. 서로 보지 못하더라도 기도 가운데 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적당한 쉼을 통해서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한국에 있는 동안 재충전을 통해 다시금 사역에 매진할 수 있도록 휴식을 갖겠습니다. 주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가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위에 함께 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