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5

성경 눅15:11~24

제목 아버지께로!

 

 

꼭 한 달 동안의 여정으로 고국을 방문하고 왔습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 강단에서 말씀을 전해 주신 장 빈, 인원 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목사님들과 함께 네 주간 동안 하나님께 훌륭한 예배를 올려드린 모든 교우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두 분 목사님 말씀이, 픽업하고 배웅하며 또 이런 저런 모습으로 정성껏 섬기시는 모습과 이 전(殿)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너무 좋아 우리교회에서 계속 목회하고 싶으시더랍니다.

그렇게 되도록 애써주신 모든 교우님들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한국에 나가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시지요?

사실 제가 한국에 나가면 가장 좋은 것이, 설교 준비에서 해방되는 겁니다.

그것 자체가 휴가가 되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 가면 가장 많은 약속이 잡히는 게 설교약속입니다.

선후배 목사님들이 선교사가 왔다고 예우하는 차원에서 강단에 많이 세워 주시지요.

그래서 보통 일 주일에 작게는 세 번, 많게는 여섯 번까지 설교를 합니다.

(어느 해인가는 한 달을 체류하면서 열 여덟 번이나 설교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따로 힘이 들지는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서야 매주 새로운 설교를 해야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기서 했던 설교 중에 뽑아서 하면 되니까요. 

오히려 청중이 다르니까 재미도 있고 성도들이 은혜 받는 것을 보면 더 힘이 납니다.

그러니까 설교하는 것 자체가 휴식이 됩니다.

부흥강사 목사님들이 부흥회 나가면서 쉰다고 하는 얘기가 뭔지 이해가 되더군요.

그리고 평일에는 짬 나는 대로 사람을 만나고 일을 봅니다.

그러니까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빨리 지나갑니다.

이게 예년 저의 한국에서의 한 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달랐습니다.

제가 머물렀던 숙소는 큰 교회 안에 있는 선교관이었는데, 교회의 여러 사정 상 10시 반 까지는 귀가해야 했습니다.

물론 교회 측에서는 그런 거 염려 말고 맘껏 다니라 했지만, 우리 때문에 신경 쓰게 하는 게 죄송해서 될 수 있으면 밤에는 약속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물려서 올해는 이상하게 제 귀국에 때맞춰 외유(外遊)하신 목사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만나는 일도 서로 시간이 잘 맞지 않아 많이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대신 가족들의 이런 저런 치료 때문에 병원 다니는 시간이 꽤 많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온 가족이 한꺼번에 한국에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올해 우리가족의 한 달은 무척 각별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치료와 진학 문제로 더 체류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어제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이런 일들에 대해 한 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올해의 한국방문을, 그 동안의 한국 방문과는 다르게 인도하셨던 이유가 뭘까?

설교나 만남은 극히 줄어들고, 새벽기도를 하게 하시고,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하셨는데 왜 그러셨을까?

그러면서 생각난 것이 오늘 본문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곳에서 나름대로 주의 일을 한다고 설교 준비하고, 성경공부하고, 새벽기도, 금요기도, 상담, 심방 등등을 하면서 지내 왔지만 혹 그 모든 일을 그냥 한 것은 아닌가, 늘 해야 되는 일이니까 관성으로 지탱해 온 것은 아닌가? 

목회는 그렇다 치고, 나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가?

하나님은 기본을 좋아하시는 분인데, 영혼의 일은 무심한 채 하나님의 일을 그냥 일로서 한 것은 아닌가?                 

내가 아들이면, 아버지는 다른 어떤 것보다 자기와 친밀할 것을 원하실 텐데 - 밭에 나가 땀 흘려 일하고 수확하는 것보다 사실은 더 깊은 부자 관계를 원하실 텐데- 그런 근본은 잊은 채, 생각 없이 영혼 없이 일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탕자 아들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나 여러분이나 다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다른 무엇보다 당신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제게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네 가지 영상으로 지나갔고, 바로 그것이 이번 한국 방문을 통해 제 자신이 깨닫기를 바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아버지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 속에 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숙제는 아버지의 모습에 우리 영혼을 투영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결론은 딱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 결론이 바로 오늘 설교 제목이 됐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모습은, 자기 몫을 달라고 요구하는 아들 앞에 서 있는 아버지입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이 남의 일이 아니고 내 일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자기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아들녀석이 제 상속분을 미리 달라는 겁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멍하게 서 있었을 겁니다.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하지만 사실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아, 네가 나와 함께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일 텐데."

나중에 큰 아들과의 대화 속에서 아버지의 이 마음이 드러나지만, 사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딱히 아들의 몫이 따로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몫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든지, 아들이 아버지 곁을 떠나든지 할 때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함께 있는 동안 자기 몫을 요구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앞에서 내 몫을 달라는 것은 아버지를 떠나겠다는 선언인 겁니다.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의 마음은 비통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계신 아버지 앞에서 내 몫을 달라고 요구한 이 아들의 모습이 왠지 낯익지 않습니까?

내가 바라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누리기를 원하는 어떤 것을 마치 내 몫이라도 되는 양, 그럴 권리라도 있는 양, 그것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요구했던 사람들이 누구지요?

그게 아들에게 불행이 될 걸 아시는 아버지가 그 요구에 응답하지 않으셨을 때, 그것이 우리를 위한 사랑이고 배려임을 모른 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아버지를 원망했습니까?

또 우리의 탐욕스런 요구가 응답 되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간단하게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곤 했습니까?

한 번 우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시지요.  

기도의 많은 부분이 사실 아버지와의 사랑 깊은 대화이기보다는 내 몫을 달라고 졸라대는 일방적인 요구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더는 아버지께 내 몫을 요구하지 맙시다.

우리가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그 분 곁에 머물기만 한다면, 아버지는 내 몫뿐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것을 주실 수 있고, 또 주고 싶어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잖아요?  

그런 아버지를 기억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또 만나게 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먼 지방으로 가서, 재산을 낭비하는 아들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기어코 자기 몫을 쥐고 먼 데로 떠나서, 허랑 방탕으로 재산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아들의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너무나 마음 아파서 차라리 귀를 틀어 막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는 당장 쫓아가서 아들을 때려서라도 집에 데려 오려고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아버지는 아예 호적을 파버리든지, 부자지간의 인연을 끊어버리려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의 아버지는 도무지 그러실 줄을 모르시는 분입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아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분도 아니고, 억지로 아들을 당신에게 데려오는 분도 아닙니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져도, 그저 아들이 돌아 오기만을 무작정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아들아, 제발 돌아와라, 제발 돌아와!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슴 속에 묻고, 끝 없이 끝 없이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떠나 자주 먼 지방으로 가곤 합니다.

먼 지방, 거기는 하나님 없이 일하는 내 직장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꾸는 나의 꿈, 하나님 없는 나의 하루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영역을 일컫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꼭 방탕해서 방탕이 아니라, 아버지 없이 내가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이 방탕일 것입니다.

아버지 없는 삶의 영역에서 아버지 없이 살아갈 때,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우리의 재산과 능력과 힘을 끝없이 낭비하고 탕진하게 됩니다.

 

혹 우리는 지금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 낯선 지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끝없이 방탕의 성을 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아버지께서 주신 사랑, 온유, 친절, 인내, 믿음과 같은 거룩한 재산을 헛되이 남용하고 오용하면서 소중한 재산을 탕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들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지켜내고 있을까요?

우리가 바로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살면서 아버지 재산을 낭비하는 아들은 아닐까요?

 

아들에게 얘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다 아시지요?

오늘 본문에는 몇 줄로 간단히 처리했지만, 사실 아들이 부잣집 아들에서 거렁뱅이로 떨어지는 과정이 우리에게 왔다면, 우리 중에는 못 견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 아들이 잘 한 것은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남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라도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야 비로소 아버지께 돌아갈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세 번째로 볼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들이 아니라 품꾼이 되길 바라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 보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 그 녀석 기특한데? 그런 생각을 다하다니, 내 아들이지만 사람이 염치가 있네! 하면서  만족해 하셨을까요?

아마도 아버지 마음은 오히려 심히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품꾼의 자격'이라는 말은 있을지 몰라도, '아들의 자격'이란 말이 가능합니까?

아들이면 아들이지 어떻게 아들의 자격이 있습니까?

아들은 어떻게 해도 아들입니다.

적어도 아버지에겐 아들의 어떤 자격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영원히 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탕하게 살아서는 아들의 자격을 얻을 수 없다, 죄에서 깨끗해야 아들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적어도 이 정도의 공로는 있어야 된다, 이만큼은 아버지를 섬겨 드려야 한다, 이 정도는 성경을 읽고, 이 정도는 기도해야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  

암암리에 우리 안엔 이런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를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했기 때문에 아들의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엇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격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아버지의 아들과 딸입니다. 믿으십니까?

 

다시 말씀 드리지만 아버지를 떠나 멀리 낯선 지방에 살았을지라도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온갖 죄를 짓고 방탕하게 살았을지라도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주신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빈털털이가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왜 자꾸 품꾼이 되려 하세요?

 

사랑은 없고 거래만 있는 관계, 믿음의 대화는 없고 명령과 복종만 있는 관계, 아버지께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내 몫과 내 삯에만 관심 있는 그런 품꾼으로 아버지 앞에서 살고 싶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아들과 딸이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아버지는 그저  우리가 돌아와서 아버지 곁에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 곁에만 있어줘도 아버지는 그냥 좋아하시는 분이세요.

그걸 믿고 돌아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지요?

정말 가슴이 먹먹해져서 읽어내려 갈 수 없는 그런 감동적인 모습입니다.

아들이 집을 향해 돌아오는 걸 보지요?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아버지가 달려 나갑니다

다들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라 그저 그렇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한 번 이 일을 여러분 자신의 일로 생각해 보시지요.

서 인원 목사님께서 설교문을 제게 보내주셨는데, 거기서도 그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자기가 가출을 하고 돌아왔는데, 군인이셨던 아버지가 강직하고 무섭기만 한 아버지인줄 알았는데 우셨다 그러지요?

세상의 어느 아버지든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으면 한 번 하루 밤만 가출하고 돌아와 보세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아들입니까?

얼마나 그리워했던 아들이예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빈털털이가 된 아들입니다.

움푹 패인 눈과 반쪽이 된 얼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행색을 하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 그 아들을 향해 맨발로 달려 나가지요.

그리고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 아마도 아버지의 눈에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을 것이고, 아들을 붙잡고 꺼억 꺼억 우셨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이보다 더 잘 묘사한 부분이 있을까요?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도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잘 설명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아버지는 이런 분이십니다.

엄연히 살아계신 아버지 앞에서 자기 몫을 챙겨 먼 지방으로 떠나 버렸던 아들,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해 버리는 한심한 아들, 아들보다는 품꾼으로 아버지 곁에 머물려는 아들!

그런 아들일지언정, 돌아온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십니다.

아버지의 망각은 용서의 능력이고 사랑의 크기인 겁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크게 성공해서 돌아오는 아들을 기뻐하듯이 아버지는 조촐한 아들의 귀향도 기뻐하십니다. 

튼튼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든 허약한 몸으로 돌아오든, 좋은 선물을 들고 돌아오든 근심과 걱정거리를 들고 돌아오든, 아버지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아들,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아들, 그 자체가 너무 좋아서 이토록 기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절대로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아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기쁨,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유일한 기쁨인 겁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아버지께 돌아갑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삽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태에 있든 우리는 날마다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아버지 앞에서 내 몫을 요구하는 습관이 있고,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수시로 먼 지방으로 떠나버리고, 아버지 없이 내 마음대로 인생을 꾸려가고, 아버지가 주신 소중하고 거룩한 것들을 오늘도 끊임없이 낭비하며 탕진하고 있으며, 또한 아버지 앞에서 아들이 아니라 자꾸만 품꾼으로 지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살피며, 바로 그 곳으로부터 즉시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그렇지요?

영적인 삶은 언제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인생 전체를 큰 틀에서 봐도 우리 삶의 여정은 아버지께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삶의 매 순간 순간, 사건 사건, 국면 국면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께 돌아오라는 초청과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누구이든 간에 이 초청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생을 살아가면서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듯이 온 에너지를 쏟으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동안 감당해야 할 우리 모두의 소명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아버지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참된 소명입니다.

 

 

어제 8 비엔나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은 아직도 무척 더운데 여기는 벌써 가을이었습니다.
최 집사님의 환송을 받으면서 집으로 오는데
!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당장 주일 설교를 해야 되잖아요?

원래는 작년처럼 원고 없이 그냥 할까 했습니다.

쓸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달을 쉬었기 때문에 다시 가동하려면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시차 때문에 새벽 세 시 반에 깼습니다. 

교회로 내려와서 간단히 기도를 하고 불을 켜지 않은 채로 캄캄한 교회를 이리저리 다녔습니다.

어둡지만 제게는 어디라도 다 익숙했습니다.

설교를 쓰다가 중간 중간에 교회 뜰에도 나가고 교회 앞 거리도 산책했습니다.

바람이 벌써 차더군요.

그 바람이 저를 스쳐가는데 춥기도 했지만 얼굴에 닿는 찬 기운이 이상한 평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저를 맘껏 환영해 줬습니다.

아침에 오지리 교회의 아니타 할머니가 저를 보자 양 볼에 키스를 퍼붓고, 제 몸에 잔뜩 향수 냄새를 묻혀 놓았습니다.

이 모두를 보면서 아침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내가 돌아왔구나! 

정말 집으로 돌아왔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의 평안이 몸 구석 구석을 감는 것처럼 한꺼번에 확 밀려 왔습니다.

제가 한 것은 그냥 잘 놀다가 돌아 온 것 뿐인데, 그런데도 하나님은 교회로 돌아온 저를 기뻐해 주셨습니다.

 

어찌 보면 돌아온다는 것은 무슨 대단한 준비가 필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글자 그대로 그냥 교회로만 와도 이미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들이 한 일은 돌아온 것 뿐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게 있다면 그건 아주 단순합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란과 시험과 곤고가 닥치더라도 오늘 제목이 된 그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아버지께로!

아버지께로!

그러면 되는 겁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를 환영해 주십니다.

우리의 자격을 따지지 않고, 우리 과거의 허물을 보시지 않고, 아직 거리가 먼데도 달려 나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우리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 집으로 방향을 틉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그 아버지의 소유가 다 내 것이 되는 풍요로움과 평안함을 맘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길을 막고 서서 아버지 집으로 방향을 돌려주실 것입니다.

그 감격과 기쁨과 평안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환히 비추는 한 주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드신 비유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내 몫을 요구하고 그걸 받아 떠나며, 그리고는 방탕으로 허비하고 다시 또 아버지의 구원을 기다리는 일을 반복해 왔습니다.

이제는 정말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다시는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다시는 아들 하나만 바라고 사시는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지 않도록 그 집에 머물게 해 주옵소서.

그래서 아버지의 것이 모두 내 소유가 되는 그 평안함을 언제나 잃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