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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마
제목 내가 마실 잔
우리 나라 작가 중에 이미 40년 전에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던 이가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6.25 동란이 그 배경인데,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그 여세로 아군이 평양까지 탈환할 즈음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있던 목사 14명 중 12명이 공산당에 의해서 처형당하고 둘만 살아 남습니다.
두 사람의 목사가 왜 살아 남았는가를 정보국 사람들이 추적해가지요.
수사가 진행되면서 그 사건엔 미스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신병자가 된 한 목사는 제외 하더라도, 주인공격인 신 목사는 처형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다가 나중에야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시인합니다.
당연히 수사관들의 의혹과 분노를 사게 되고, 결국 배교자로 낙인 찍히게 되지요.
물론 신 목사 자신도 그 열 두 명의 목사들이 순교했음을 증언했고 자신은 구차하게 살아남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나는데, 사실은 사건 전체가 정반대로 벌어졌다는 것이 인민군 포로에 의해서 밝혀집니다.
즉 12명의 목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하나님을 부인하고 서로를 비난하는 추태를 보이다가 죽어갔고, 신 목사야말로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신 목사는 그곳의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자기가 배교자가 되기로 하고 죽은 12명의 목사들을 순교자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인데, 이와 비슷한 작품이 일본에도 있습니다.
엔도 슈사꾸의 ‘침묵’이라는 소설입니다.
‘침묵’은 엔도 슈사꾸가 1966년에 발표한 작품인데 일본의 개화기인 17세기가 배경이 됐습니다.
어느 날 로마 교황청에 한 가지 보고가 들어 옵니다.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 신부가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배교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황청에서는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인 로드리고 신부를 일본에 보내지요.
로드리고 역시 우여곡절 끝에 일본 땅을 밟게 되고, 도착해서 한참 만에야 진짜 배교자가 된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페레이라 신부에게 있었던 박해가 로드리고에게도 그대로 닥칩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 자신도 구리판으로 만든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면서 배교자가 됩니다.
결국 두 신부 다 일본 땅에서 박해자들이 지명해준 여자와 결혼하고 집도 하사 받으면서 일본인으로 살아간다는 얘기입니다.
뭐냐 하면 당시에 팽배해 있던 기독교인들의 대체적인 생각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입니다.
즉 당시만 해도 크리스천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되고, 그럴 수 없을 때엔 장렬하게 순교해야 한다는 게 기존의 생각이었는데, 그 틀에 이의를 제기한 겁니다.
사실 이 작품들은 평론가적인 자세한 해설을 덧붙여야 제대로 이해가 될 만큼 난해합니다. 그렇게 많은 문제를 담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쉽게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모든 상황이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배교와 순교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 받는 상황은 올 수 있는 건데 그때의 갈등이 선하냐 악하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배교하면서도 마음 아파하는 그 모든 상황들을 단선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또는 옳다 그르다 쉽게 판정 내리기는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오늘날로 얘기하면 오래도록 교회를 나오지도 않고, 크리스천으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업을 해 나가면서 겪는 갈등들, 또는 직장 생활 하면서 동료들과 이런 저런 자리에 회동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섞여 사는 모습을 보고 타락하고 배교했다고 단정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그런 삶이 이렇다 저렇다, 진짜 크리스천이다 아니다 단정하기엔 모든 상황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회를 아주 떠나거나 또는 극단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을 보면서, 그를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는 그 모든 정황을 볼 때 하나님께 그를 받아달라고 기도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이런 미묘하고도 간단치 않은 상황에서 과연 우리 믿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요?
어떻게 하면 이런 쉽지 않은 상황을 돌파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나누려고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말씀 가운데 은혜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라고 복잡하게 소개했는데, 세배대라는 사람의 아내겠지요.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자기 두 아들을 위해 부탁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 시키는 날이 오면, 자기 두 아들 – 야고보와 요한이지요? – 을 각각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합니다.
즉 요즘 말로 하면 장관 자리를 하나씩 달라는 인사청탁인 거지요.
예나 지금이나 자식들을 위한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이 여인은 자기가 하는 청탁의 의미를 잘 모르고 청탁한 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면 그럴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추적해 보니 이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끝까지 남아 있던 세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각각 다른 표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또 한 사람은 야고보(작은)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였고 마지막 한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리고 요19:25에 보면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라는 사실이 나오고 이름은 살로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합해 보면,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는 이종사촌 지간이었고, 지금 청탁을 하는 여인 살로메는 예수님의 이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모가 조카한테 청탁을 하는 건데, 어떻게 이모가 조카한테 그런 정도 부탁도 못하겠습니까?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이 건설하려고 하는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청탁은 시작부터가 어긋났고, 심지어는 당사자인 야고보와 요한조차도 나중에야 그 나라가 어떤 나라였는지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살로메의 이런 청탁을 받고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되묻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그랬더니 “예, 그럴 수 있습니다” 대답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마실 잔이 어떤 건지, 그리고 주시는 이가 누구신지 설명하시곤 오늘 얘기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우리 모두가 다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후, 예수님이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 승천 하신 후, 보내신 성령을 받고야 그 둘은 비로서 자기들이 마실 잔이 무엇인지 알고 각자 자기의 길을 떠납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볼 것은 두 형제의 행보입니다.
그들은 형제였지만 갔던 길은 사뭇 달랐습니다.
이들이 마신 잔이 어떤 것인지 알면 우리의 문제도 자연스레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형인 야고보는, 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행12장 1~2절이 그 내용을 잘 알려주고 있지요.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지금 전통적으로 내려 온 유대교가 이상한 종교 집단에 의해 위태롭게 됐습니다.
가만 두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기독교 지도자 중에 몇을 죽이기로 했는데, 그 중에 야고보가 가장 먼저 희생된 겁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일 뒤에 그리스도교는 박해를 피해 지하로 또는 세계로 흩어집니다.
예루살렘 안에만 머물러 있었던 기독교가 이 야고보의 죽음 후에는 여러 곳으로 흩어지고, 그것은 자연스레 유대와 사마리아와 먼 이방에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됐던 겁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몸으로 복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단 한 번의 사건으로 기독교가 만방에 퍼져 나가는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격동적이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굵고 짧은 생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공헌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좀 더 살아서 좀 더 큰 일을 좀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자기 나름의 잔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동생 요한은 형 야고보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90세가 넘도록 장수했습니다.
그래서 노구에 밧모섬으로 유배돼서 거기서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남기지요.
요즘은 장수가 축복이지만, 사실 당시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오래 사는 것이 결코 축복이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제자 중에 가장 어린 자였습니다.
형님들은 다 순교했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의심 많던 도마까지 인도에 가서 순교했습니다.
그런 마당에 백수를 바라보며 살았다는 것은 수치면 수치지 자랑할 만한 일은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잔을 충실히 마시며 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사실 요한이 맘만 먹었다면 그 역시 순교할 수도 있지 않았겠어요?
형님 잡혀갈 때 “나도 붙잡아 가시요” 했더라면 그도 순교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교회를 지키면서 믿음의 투쟁을 해 나갔습니다.
매일 매일을 성실하게 살면서 주의 나라를 조금씩 확장해 나갔던 겁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남은 형제들의 훈련을 위해 성경을 하나씩 기록해 나갔던 겁니다.
두 형제가 마셨던 잔, 두 형제가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은 서로 달랐지만 둘 다 복음을 견고케 하고 주의 나라를 확장시켰다는 점에서는 하나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강조하고 싶은 점도 바로 이것입니다.
굵고 짧고 격동적이고 순교적인 삶도 영광스런 삶이지만, 반대로 하루 하루 주어진 일을 해 나가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도 칭찬받아 마땅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지요.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자녀들 때문에, 또는 당장 치루지 않으면 안 될 일 때문에 격동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런 후회와 회한의 기도가 많습니다. 누구든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나 주님이 제시하신 길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닥친 매일 매일의 잔을 마시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십자가를 잊지 않고 말씀 속에서 희생하는 자세, 그게 우리에게 제시하신 잔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 또 서두에 말씀 드린 신 목사나 페레이라, 다들 자기가 마실 잔들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를 살아가는 게 결코 수월치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다 그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얘기가 무슨 얘긴지 실상은 이렇습니다.
지난 주 어떤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들었던 얘기입니다.
그 목사님이 신학생 시절에 어느 시골 교회로 목회 실습을 나갔는데, 그 교회의 목사님은 의사처럼 각각의 성도들 상황을 기록한 챠트를 두고 있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학생인 그 목사님께 보여주면서, 교회를 안 나오는 성도를 향해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라 몹시 분개하더라는 겁니다.
그 내용이 이랬답니다.
어느 집사의 챠트를 펼쳤는데, 주일에 몇 번 결석한 상황이 나오고, 그 가장 아래 쪽엘 따라가 보니, 굵고 빨간 사인펜으로 ‘타락’ 이라고 썼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또 어떤 성도는 그 교회를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간 사람이라고 설명해 주면서 맨 아래 쪽에 ‘배교’ 라고 써 두었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만약에 그렇게 주일 몇 번 빠지고, 다른 교회로 갔다고 타락 또는 배교라고 한다면 우리 중에 타락하지 않고 배교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논리로 보면, 신 목사나 페레이라, 로드리고, 심지어는 한때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조차 배교자가 될 겁니다.
우리 상황은 그리 간단 명료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알고 나면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함부로 어떤 잣대로 판단 당하는 게 억울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라고 왜 사도들처럼 우리 앞에 주어진 잔을 마시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라고 왜 십자가의 길을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잘 알잖아요?
맨날 결심해도 맨날 쓰러지잖아요?
계획을 세워도 작심 삼일 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잖아요?
재작년 10월에 말씀 축제 때 강사로 오신 전승환 목사님 아시지요?
그 분은 중학교 때 저를 처음으로 교회로 인도하신 친 형님 같은 분입니다.
그분이 그때 오셔서 함께 여행을 하면서 제게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하루는 금요 기도회 시간이 다 됐는데 아무도 오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가까운 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 제가 그때 그 교회의 집사였습니다- 제가 막 짜증을 내더래요.
왜 나한테만 그렇게 다그치냐고요. 오늘 안 나간다고 심하게 어긋장을 놓더라는 겁니다.
(사실 전 제가 정말 그랬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제일 편해서 그랬던 건데 저한테 그런 대접을 받고 그날 많이 우셨답니다.
여러분! 저도 그런 사람입니다.
사실 성도로서는 금요기도회 한 번 나가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것 한 번으로 어떻다 판단한다는 게 얼마나 무리입니까?
그건 제가 목사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적어도 한 시간씩은 기도해야지 맘 먹고도 몇 분 지나면 할 기도가 없는 거예요.
설교도 좀 더 일찍 잘 준비해야지 하면서도 주말이 돼서야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서두릅니다.
좀 더 부지런해져서 홈페이지에 많이 채워야지 하면서도 생각 뿐입니다.
사실은 사랑한다 말하지만 그 사랑은 립 써비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교인들의 마음을 헤아려 줘야지, 전화라도 한 통화 해 줘야지 하면서도, 실천은 뒷전이고, 말 한 마디도 사려 깊게 못하고 또 행동은 생각나는 대로 하고 멋대로일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돌아보면서 나 자신을 미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시 결심합니다.
다시 시작해야지!
왜 그렇지요?
주님이 저의 연약함을 알고 계시니까요?
우리 주님은 쉽사리 중간평가를 하시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여러분들도 그렇지요?
오늘부터 묵상해야지, 기도해야지, 성경 읽어야지 결심 하고서도 잘 안 되시지요?
그 동안 소원했던 사람과 화해해야지, 잘 해 주어야지 하면서도 마음 뿐이지요.
봉사 하는 것도 기쁘게 즐겁게 해야지 하면서도 사람을 보면 그런 마음이 달아나지요?
그래서 매일 후회 밖에는 할 일이 없을 때가 있으시지요?
그런데 여러분!
어떠냐 하면, 우리 주님은 그걸 다 아세요.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아세요.
우리가 각자의 잔을 마시는 게 쉽지 않은 것을 아세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시점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 낙심과 한탄 속에서도 또 다시 시도해 보는 거예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또 쓰러지더라도 일어나고 또 부여잡는 겁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세요.
바로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거잖아요.
그리스도를 잊지 말고, 조금 조금씩 나아지면 되는 겁니다.
때로는 정말 우리가 마음이 지쳐 기도도 못할 때가 있는 것도 아세요.
그래도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다시 일어나세요!
그 모습이 바로 우리가 마셔야 될 잔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는 자로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게 격려해 주세요.
용기를 심어 주시라 말입니다.
“그래, 괜찮아 다시 일어나자, 이번에도 승리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해 보자!”
그게 우리가 마실 잔인 겁니다.
외국 생활이 얼마나 힘 드세요?
사업하는 것, 직장 생활 하는 것, 외롭게 공부 하는 게 얼마나 힘드세요?
하지만 다시 한 번 기억하세요
주님이 여러분의 상황을 잘 알고 계세요.
그리고 제가 늘 기도하듯이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여러분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숨을 거둬 가신답니다.
그러니 다시 일어나서 용기 있게 여러분의 길을 걸어 가세요.
그러면 언젠가는 여러분도 야고보, 요한처럼, 또는 예수님처럼 여러분 앞에 놓여 있는 여러분의 잔을 마실 수 있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하루 하루 조금 조금씩 진보해 나가는 것!
그게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이고 우리가 마실 잔입니다.
이런 은혜 가운데 하루 하루 승리해 가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처한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참 은혜스러운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목사님 화이팅!!